- 한계를 모르는 도전으로
예술을 일상에 뿌리내리다 - 더하우스콘서트 박창수 대표 인터뷰
즉흥 연주와 실험 음악을 통해 음악적 사유를 무한대로 확장해온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그리고 행동하는
신념가로서 더하우스콘서트의 박창수 대표는 국내 음악계에 새로운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하우스콘서트’, ‘원데이 페스티벌
및 ‘원먼스 페스티벌’을 통해 예술가들에게 더 많은 연주 기회를 제공하고, 음악으로 세계가 하나로 이어질 수 있음을
증명했으며 누구나 ‘문화와 함께 하는 삶’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7월에 열릴
‘원먼스 페스티벌’ 준비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가까이서 느끼는 음악의 생명력
박창수 대표는 1986년 바탕골 소극장에서 <Chaos>라는 뮤직 퍼포먼스로 정식 데뷔한 이래, 매 작품마다 색다른 변신을 추구하며 음악가로서 안주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활동하며 예술가로서 독보적인 한 획을 그었지만, 강렬한 잔상으로 남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를 새로운 도전의 영역으로 이끌었다. 서울예고 재학 시절, 친구의 집에서 연습을 하며 그는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운 음악의 생명력에 매료됐다.
마룻바닥을 타고 울리는 음의 진동까지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야말로 진정한 음악과의 교감이라는 확신이 그 순간 분명해졌다. 그로부터 20년 후, 2012년에 연희동 자택 일부를 개조해 만든 공간에서 국내 최초로 하우스콘서트(이하 하콘)를 열며 그의 꿈은 현실이 됐다. 관객들은 의자가 아닌 마룻바닥에 앉아 공연을 관람했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연주자와 관객들이 함께 와인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뒤풀이’가 이어졌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사라지고, 예술가와 관객의 거리가 좁혀지는 신선한 시도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2008년을 기점으로 그는 집을 떠나 다양한 공간으로 이전하며 돌풍을 이어갔고, 2014년 12월부터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아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공연을 올렸다. 2016년에 500회를 돌파하는 저력을 과시했고, 지난해부터는 대학로뿐만 아니라 목동과 도곡동, 세 개의 공간을 순회하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효율적인 구조라고 할 수 없죠. 힘든 시기도 많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이겨낼 수 있었어요.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개념조차 생소했지만, 이제는 하콘을 진행하는 곳이 꽤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말인즉슨 크고 화려한 극장에서만 좋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었다는 거죠.”
마룻바닥을 타고 울리는 음의 진동까지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야말로 진정한 음악과의 교감이라는 확신이 그 순간 분명해졌다. 그로부터 20년 후, 2012년에 연희동 자택 일부를 개조해 만든 공간에서 국내 최초로 하우스콘서트(이하 하콘)를 열며 그의 꿈은 현실이 됐다. 관객들은 의자가 아닌 마룻바닥에 앉아 공연을 관람했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연주자와 관객들이 함께 와인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뒤풀이’가 이어졌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사라지고, 예술가와 관객의 거리가 좁혀지는 신선한 시도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2008년을 기점으로 그는 집을 떠나 다양한 공간으로 이전하며 돌풍을 이어갔고, 2014년 12월부터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아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공연을 올렸다. 2016년에 500회를 돌파하는 저력을 과시했고, 지난해부터는 대학로뿐만 아니라 목동과 도곡동, 세 개의 공간을 순회하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효율적인 구조라고 할 수 없죠. 힘든 시기도 많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이겨낼 수 있었어요.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개념조차 생소했지만, 이제는 하콘을 진행하는 곳이 꽤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말인즉슨 크고 화려한 극장에서만 좋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었다는 거죠.”
하콘이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적인 문화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출연자들과 쌓은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높은 공연 수준을 유지해온 것과 입장료 2만원에 그날 수입 절반이 연주자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시스템을 고수해온 덕분이다. 남은 비용은 뒤풀이와 운영자금으로 썼다. 영리를 추구하기보다 나눔의 예술을 지향하는 하콘의 취지에 공감한 관객들은 자원봉사자, 혹은 스태프가 되어 하나둘씩 힘을 보탰다.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에 보답하기 위해 하콘은 특별한 기획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선보였고, 자연스럽게 떡잎부터 남다른 신예들을 발굴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조성진이 하콘 무대에 처음 선 게 중학생 때예요.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훨씬 이전이죠. 그들은 무명 시절부터 잠재력과 가능성을 알아봐준 것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아요. 그래서 적은 출연료에도 무대에서는 남다른 의리를 보여주고 있죠. 그들이 성장하면서 하콘도 같이 성장해온 셈이에요 .”
지역과 국경의 경계를 넘어 소통하다
하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유학 후, 국내로 돌아온 연주자들의 실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던 그는 원인 파악을 위해 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국내에 500석 이상의 홀을 보유한 극장이 400개에 달하고, 그 극장의 평균 가동률이 1년에 10회 미만이라는 어두운 현실에 놀란 그는 400개 공연장에 매달 1개씩, 연간 약 5,000개의 공연을 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2012년 ‘대한민국 공연장 습격작전’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전국 23개 극장에 일주일간 100개 공연을 올렸다. 횟수뿐만 아니라, 하콘의 기본 정신과 원칙을 그대로 지켜냈기에 더욱 값진 결과라 할 수 있었다.
“관객들을 무대 위로 올리겠다고 선언했어요. 객석에서는 장난치고 산만하던 아이들도 무대에만 오르면, 무서울 정도로 집중해요. 아이들은 무대를 스크린이나 TV 모니터로 생각하거든요. 안전 문제로 우려를 표하는 극장 관계자들을 간신히 설득해 계획을 현실화할 수 있었죠.”
연주자들도 뜻깊은 프로젝트에 적극적 참여로 화답했다. “처음 이 프로젝트를 이야기하며 연주자들에게 내건 조건이 이번만큼은 개런티도 줄 수 없고, 차비만 주겠다. 어느 곳이든 가라는 지역으로 가주십사 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이 제안을 들은 연주자들의 94%가 선뜻 동참하겠다고 나선 거예요. 그 이유는 하콘이 10년 동안 이어져오면서 이런 활동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게 각인이 됐기 때문이라고 봐요. 처음에는 지방에 가는 걸 꺼리던 연주자들도 이제는 서로 가겠다고 자청할 정도예요. 개인 리사이틀을 하면, 보통 가족부터 친구·제자들처럼 지인이나 관계자가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동원된 관객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공연을 보러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진짜 관객이고,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걸 느낄 수밖에요.”
“관객들을 무대 위로 올리겠다고 선언했어요. 객석에서는 장난치고 산만하던 아이들도 무대에만 오르면, 무서울 정도로 집중해요. 아이들은 무대를 스크린이나 TV 모니터로 생각하거든요. 안전 문제로 우려를 표하는 극장 관계자들을 간신히 설득해 계획을 현실화할 수 있었죠.”
연주자들도 뜻깊은 프로젝트에 적극적 참여로 화답했다. “처음 이 프로젝트를 이야기하며 연주자들에게 내건 조건이 이번만큼은 개런티도 줄 수 없고, 차비만 주겠다. 어느 곳이든 가라는 지역으로 가주십사 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이 제안을 들은 연주자들의 94%가 선뜻 동참하겠다고 나선 거예요. 그 이유는 하콘이 10년 동안 이어져오면서 이런 활동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게 각인이 됐기 때문이라고 봐요. 처음에는 지방에 가는 걸 꺼리던 연주자들도 이제는 서로 가겠다고 자청할 정도예요. 개인 리사이틀을 하면, 보통 가족부터 친구·제자들처럼 지인이나 관계자가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동원된 관객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공연을 보러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진짜 관객이고,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걸 느낄 수밖에요.”
모두가 불가능을 말할 때, 그는 지난 성과를 뛰어넘으며 가능한 영역을 넓혀나갔다. 2013년에는 한날한시에 전국 65개 장소에서 294명의 예술가가 1만 명의 관객을 만나는 ‘원데이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2014년에는 아시아를 하나의 거점으로 연결하는 ‘한·중·일 원데이 페스티벌’을 총 94곳에서 진행했다. “비록 정치·경제적으로는 한국이 주도권을 쥐기 어렵다고 할지언정, 문화만큼은 우리가 리드해나가자는 생각에서 추진했던 겁니다. 특히 중국에는 한국인들의 방문이 드문 외진 지역까지 60여 명의 연주자를 보내 현지 교민들에게도 좋은 추억을 만들어드릴 수 있었죠.” 마법과도 같은 하루를 장식한 ‘원데이 페스티벌’의 성공에 힘입어 매년 2015년부터는 7월 한 달 내내 공연이 펼쳐지는 ‘원먼스 페스티벌’을 매해 개최해오고 있다. 2016년부터는 ‘페이스북 라이브’를 통해 관객과 더욱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으며 지난해부터는 클래식을 중심으로 보다 다양한 예술 장르의 공연을 선보이며 축제를 더욱 다채롭게 꾸미고 있다.
* 출처. The House Concert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환경을 바꿔나가는 게 진짜 기획이라고 생각해요. 전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요. 또 이 일은 돈으로만 환산하려고 하면 결코 할 수 없어요. 어떤 의미로 일을 하느냐,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느냐가 더 중요하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선생이 ‘원먼스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것을 보고, 어떻게 섭외했느냐고 의아해해요. 저희가 연락드린 적 없어요. 먼저 저희에게 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히셔서 2015년에 강원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연주회를 추진했죠. 직접 연주는 물론이고, 아이들과 합주까지 하셨어요. 받은 출연료도 기증하셔서 선생님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오카리나와 학용품을 선물할 수 있었죠 .”
뿐만 아니라 지방 순회 기획 공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 ‘문화가 있는 날’ 등을 운영하며 예술을 우리의 일상 속에 뿌리내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지만, 국가 지원금의 축소 및 후원의 부재로 인해 운영상의 어려움은 가중되고 있다. 사재까지 털어가며 위기를 돌파해왔지만, 현재는 그의 순수한 취지에 공감해주는 후원자들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또한 그가 만든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동료들을 꾸준히 찾고 있다. ‘문화설계자’로서 쉴 틈 없이 바쁘게 달려왔지만, 아티스트로서 그의 본분을 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난해 11월 한 달간, 30개의 장소에서 매일 프리뮤직을 선보이는 강행군을 소화하기도 한 그는 인생의 나이테에 ‘열정’의 발자취를 새기며 묵묵히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
뿐만 아니라 지방 순회 기획 공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 ‘문화가 있는 날’ 등을 운영하며 예술을 우리의 일상 속에 뿌리내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지만, 국가 지원금의 축소 및 후원의 부재로 인해 운영상의 어려움은 가중되고 있다. 사재까지 털어가며 위기를 돌파해왔지만, 현재는 그의 순수한 취지에 공감해주는 후원자들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또한 그가 만든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접점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동료들을 꾸준히 찾고 있다. ‘문화설계자’로서 쉴 틈 없이 바쁘게 달려왔지만, 아티스트로서 그의 본분을 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난해 11월 한 달간, 30개의 장소에서 매일 프리뮤직을 선보이는 강행군을 소화하기도 한 그는 인생의 나이테에 ‘열정’의 발자취를 새기며 묵묵히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
* 출처. The House Conc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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