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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사랑한 궁궐, 창덕궁
역사가 있는 여행
겨울, 창덕궁은 다소곳하다. 눈 덮인 인정전에는 정적이 흐르고, 선왕의 흔적은 서까래 위에 덧씌워져 뿌리 깊은 사연을 만들어낸다. 창덕궁은 조선의 임금이 사랑한 궁궐이었다.

글과 사진. 서영진(여행 칼럼니스트)

창덕궁 담장 너머는 사람 사는 세상이다. 경계가 되는 궁 담벽 위로 3층집 빌라 발코니가 나란히 흐르고, 세탁소 간판이 고개를 비쭉 내민다. 창덕궁은 이런 풍경이 제법 잘 어울린다. 궁은 위세 등등해야 하며, 크고 강직해야 한다는 선입견은 창덕궁 안에서 퇴색된다. 창덕궁에 얽힌 사연은 소담스럽고, 사람 사는 향기가 묻어난다. 궁궐 안의 스토리와 궐 밖 풍경은 큰 턱 없이 평화롭게 공존한다.
창덕궁은 조선의 궁궐이다. 경복궁을 창건한 지 10년 만에 태종이 다시 올린궁이다.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태종은 혈육의 피로 얼룩진 경복궁에 머무는걸 원하지 않았다. 창덕궁을 지었고 ‘두 개의 궁’ 체제로 나라를 운영했다. 의례를 주관했던 경복궁은 엄격하게 건립했다. 남북 일직선 상에 빈틈없이 궐문과 정전을 일렬로 세웠다. 반면 창덕궁은 북악산 자락의 품에 안긴 대갓집 같은 분위기다. 창덕궁의 동선은 돈화문, 금천교, 인정전 등이 ‘ㄱ’자 혹은 ‘ㄴ’자로 꺾여 만난다. 건물들 역시 산자락을 따라 어깨를 맞추듯 나란히 배치됐다.
왕의 차고였던 ‘빈청’ 찻집
창덕궁을 알현하는 템포는 ‘안단테’다. 속도를 줄이면 임금님의 얘기가 가슴 깊이 내려앉고, 몸을 낮추면 선현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궐문 앞 월대는 궁의 품위와 권위를 상징한다. 돈화문 월대 아래 내려서 창덕궁을 바라보면 북한산이 액자처럼 문 안에 담긴다. 돈화문 월대는 100년 가까이 땅속에 파묻혀 있었다. 순종 때 임금을 위해 마련한 자동차가 내전으로 들어오기 위해 장애물이 되는 월대를 흙으로 덮었고 최근에서야 제 모습을 되찾았다. ‘순종과 어차’에 관한 일화는 창덕궁 곳곳에 남아 있다. 희정전 앞에 들어선 기념품 가게 겸 찻집은 예전에 관리들이 임금을 만나기 위해 대기하던 빈청이었다. 현세의 찻집이지만 어엿한 궁궐 건물이기에 입구가 커튼처럼 드리워진 낙양각으로 치장돼 있다. 그 후 빈청은 순종의 차를 세워놓던 어차고로 쓰였다.
세계 여느 도시 중 한 도성 안에 궁궐이 5개인 곳은 서울이 유일하다. 창덕궁은 종묘와 함께 1997년 우리나라 처음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창덕궁은 돈화문, 진선문, 인정문을 거쳐야 핵심 건물인 인정전에 다다른다. 돈화문에 들어서면 금천이 길동무처럼 이어진다. 금천 좌우에는 천연기념물인 회화나무 고목이 도열해 있다. 궁을 조성할 때는 회화나무를 함께 심는 게 원칙이었다. 궁의 전각들이 화재로 소실될 때도 회화나무들만은 오래된 충신처럼 허리를 구부린 채 궁을 지켰다. 보물 1762호인 금천교는 서울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다. 기둥에는 전설 속 백수의 왕인 ‘산예’를 조각했고, 쌍무지개 다리 아래에는 돌거북이 머리를 쳐들고 있다. 금천교에서 진선문을 바라보면 일직선이 아니라 축이 비틀어져 있다. 진선문 넘어 회랑으로 둘러싸인 마당 역시 직사각형이 아닌 사다리꼴이다. 격식 파괴의 창덕궁은 모든 것이 관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듯싶다. 세종의 상왕인 태종은 마당이 반듯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당시 건설 책임자인 박자청을 하옥시켰다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돼 있다.
왕의 산책로 후원, 숙종의 고양이 ‘금손’
낙선재를 벗어나 후원으로 향하면 궁궐의 뒷동산이 펼쳐진다. 창덕궁이 왕의 사랑을 받은 연유에는 후원이 큰 몫을 했다. 자연과 어우러져 골짜기마다 조성된 정원을 거닐며 임금은 고독을 씹고 풍류를 즐겼다. 창덕궁 후원이 일반에 개방된 것은 2004년 5월의 일이다.
후원에는 왕들의 세월과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정조가 시 짓기 내기로 신하를 연못 안 섬까지 유배 보낸 얘기며, 왕이 물고기를 낚으면 풍악을 울렸다는 비화들은 부용지에 얽힌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이다.
숙종이 즐겨 찾던, 불로문 옆 애련지에서 맞는 일화는 정겹다. 숙종은 조선왕 중 고양이를 사랑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금손’이라는 노란 고양이를 키웠으며 식사 후 남은 고기를 금손을 위해 챙겼다는 사연이 전해 내려온다. 지난해 청와대에 입성한 문 대통령의 찡찡이가 ‘퍼스트 캣’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금손이 찡찡이보다는 선배인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후원에 북한산 호랑이가 출몰했으며 사람을 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내전에 선비집을 닮은 낙선재가 있다면 후원에는 연경당이 있어 궁궐 아닌 양반집에 놀러 온 기분이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지은 집으로 마구간, 아궁이, 굴뚝 담 등이 소박하게 담겨 있다. 이 밖에 두 겹의 지붕을 올리고 정조의 정치 철학을 현판에 기록한 존덕정, 부채 모양의 관람정, 논농사를 살폈던 청의정 등이 후원이 간직한 아담한 정자들이다.
후원 산책은 자연스럽게 담자락 너머 북촌 나들이로 연결된다. 창덕궁에서 느꼈던 사람 향기는 수더분한 한옥 골목의 북촌에서 더욱 풍요롭다. 현대사옥에서 중앙고로 이어지는 계동 골목은 오래된 목욕탕, 의원, 이발소 등 토박이 주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남았다. 가회동 31번지 일대 골목은 북촌에서도 한옥이 가장 잘 보존된 인기 명소다. 이 외에도 개방 한옥과 공방들이 숨어 있는 가회동 공방 골목, 갤러리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사간동 갤러리 골목 등이 북촌이 자랑하는 주요 산책 코스다.
북촌의 골목길은 1750년 도성도에도 고스란히 등장한다. 2018년의 북촌 역시 현지 주민들과 이방인들의 삶이 뒤엉킬 뿐, 한옥이 옹기종기 들어선 모습은 여전하다. 북촌 산책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북촌방향>을 보고 나서면 새롭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계절이 눈 오는 겨울이다. 같은 계절에 흑백영화 한 편 보고 창덕궁과 북촌을 서성거리는 것은 꽤나 운치 있다.
인정전의 변신, 단청 없는 낙선재
현재의 창덕궁은 임진왜란 후 중건된 뒤 수백 년간의 증축, 화재, 소실, 복원 과정을 거쳤다. 공식 행사를 치르던 인정전, 임금이 정무를 보는 선정전,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등이 형식상 창덕궁의 주요 건물들이다.
국보인 인정전은 일제강점기 때 모습이 바뀌었다. 잔디밭을 조성하고 내부에 무쇠로 만든 샹들리에 수백 개를 걸었다. 벽에 있던 왕조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는 한때 봉황으로 바뀌었다. 창덕궁을 재조명하며 원상태로 복원된 것도 있지만, 인정전 나무바닥 등은 그대로 남겨뒀다.
인정문과 어깨를 맞댄 선정전은 푸른색 기와지붕이 돋보인다. 단아한 품격의 대조전은 뒷마당의 정원이 탐스럽다. 임금의 서재였던 희정당은 순조때 편전으로 활용됐고. 순종 때는 손님을 맞는 접견실로 쓰였다. 처마 곡선을 그리며 휘어 나가는 화려한 건물로 변신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내전 끝자락의 낙선재는 궁궐 건물로는 이례적으로 단청 없는 건물이다. 헌종은 낙선재를 올리며 선비들의 사랑채처럼 수수하게 지을 것을 주문했다. 검소한 듯 보여도 창살 등에는 섬세함이 묻어난다. 낙선재는 사람이 살던 체취가 있어 더욱 사랑받는 공간이다.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이 낙선재였고,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의 장례식 역시 낙선재에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