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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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을 꾼다는 행복
대구 방촌시장 ‘그곳에 가면’ 대표 서정백 씨
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꿈을 가져본 사람은 안다.
좌절해본 사람은 더 절실히 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성공 가도를 달리던 한 청년의 꿈이 깨어지던 순간, 그는 세상을 잃었다. 깊고 긴 터널을 지나 다시 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는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함께 맞잡은 손이 있으므로.

글. 차유미 / 사진. 김근호

일찍 세상으로 뛰어들다
서정백 씨(50)는 남들보다 빨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결혼을 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대구상고를 졸업했으니 금융권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은 부모님의 바람이었다. 서정백 씨는 한자리에 앉아서 진중함을 발휘해야 하는 일에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첫 직장은 현대자동차 승용1공장 품질관리 1부. 맡았던 일은 당시 인기를 끌던 승용차의 부품을 개발해서 생산하는 일이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서정백 씨는 정확하게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대기업이라 급여도 많이 받았어요. 가정도 일찍 이루었고 직장도 있었으니 당시에는 두려울 게 없었어요. 그때는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안정된 생활에 만족했지요.”
그러던 서정백 씨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노조활동을 하면서 마찰이 생긴 것이었다. 그후 현대자동차의 2차 밴드 회사에서 일을 하다 오랜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안정된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온 서정백 씨가 새롭게 시작한 사업은 주점이었다. 오후 4시부터 새벽까지 영업을 했다. 물론 밤12시까지가 법에서 정한 시간이었지만 단속을 피해 영업하는 날이 많았다고 고백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먹고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요식업에 발을 담그다
뒤바뀐 밤과 낮, 끼니를 거르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술장사를 하다 보니 술을 자주 마시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몸이 상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본 누님이 서정백 씨를 불렀다. 당시 누님은 왜관에서 요식업체를 크게 운영하고 있었다. 누님을 도와 가게 운영에 참여했다. 장보는 일이며, 요리를 하고, 사람을 쓰는 일 등을 직접 겪어보며 가슴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는 서정백 씨.
“아! 참 재미있더라고요. 그때 한 번 시장에 가면 한 트럭씩 채소를 실어 왔어요. 일하는 분들 출퇴근을 시켜줘야 해서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늦게 마무리해야 했어요. 그래도 신이 났어요.”
그렇게 누님 가게에서 재미를 느낀 서정백 씨는 왜관으로 옮긴 지 1년 반 만에 자신의 가게를 차렸다. 돼지갈비를 주로 하는 음식점이었다. 돼지갈비집은 누님의 가게와는 달랐다. 불을 피우고 밑반찬을 만들고 불판을 다루는 일, 가짓수를 세기 어려운 일들이 새로 생겼다. 하지만 그는 신이 났다. 입소문을 타면서 가게는 줄을 서야 입장하는 유명 맛집이 되었다. 서정백 씨는 이때 처음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한다. “음식을 먹는 사람들 표정을 보면 뿌듯했어요. 이걸로 성공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련은 한꺼번에 찾아온다
하루 1인 6역을 하며 30kg이 넘는 몸무게가 빠져도 마냥 신나기만 했던 서정백 씨에게 시련이 닥쳤다. 집안 사정으로 돼지갈비집을 접어야 했던 것. 분쟁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그는 손해를 감수하고 돼지갈비집을 포기했다. 그리고 중국요리집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소비가 위축되니 외식사업 역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결국 빚을 떠안은 채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사업체를 접고 대구로 복귀하면서 생활을 위해 공사장에서 목수로 일을 하게 되었다.
재주가 있다고는 하나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은 아니다 보니 서투른 점도 있었다. 더욱이 외식사업을 하다 고질병이 되어버린 허리 디스크에 고통이 더 심해졌다. 2015년 10월 31일 오전 11시. 3m 높이에서 형틀 작업을 하던 서정백 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 생각도 안 났어요. 그냥 멍하니. 이게 끝인가 보다, 생각했지요.”
금두수 대리를 만나다
서정백 씨가 근로복지공단 대구서부지사 금두수 대리를 만난 것이 바로 이때다. 금 대리에게 당시 산재사고로 인해 팔목 골절 치료를 받았던 서정백씨는 까다로운 고객이었다. 금 대리는 “산재 고객으로 처음 만났어요. 퇴원하시고도 계속 팔이 아프다고 불만이 많으셨지요.”라고 서정백 씨와의 만남을 기억한다.
금두수 대리는 서정백 씨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으며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먼저 다친 팔의 재검사가 필요했다. 금 대리의 조언에 따라 대학병원에서 재검사를 해보니 팔꿈치에서 미세 골절이 발견되었다. 사고 당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골절이 있었던 것이었다.
금 대리는 사고 당시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골절을 추가상병으로 접수해 서정백 씨가 다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서정백 씨에게 재활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서정백 씨는 의지가 강한 분이셨어요. 먼저 찾아와서 이런 게 해보고 싶다, 라고 얘기하시고 제가 무엇인가를 제안하면 해보겠다고 하시고.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하셔도 속은 굉장히 여리고, 성실한 분이세요.”
서정백 씨의 강인한 의지와 금두수 대리의 사기진작이 환상의 빛을 발했다. 금 대리가 공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재활 프로그램을 찾아 소개하면 서정백 씨는 이를 잘 따랐다. 금 대리는 처음부터 창업에 뜻이 있던 서정백 씨에게 창업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서정백 씨 또한 직업훈련 과정에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외식창업 훈련까지 마무리했다
다시, 꿈을 꾸다
2017년 8월 11일 서정백 씨는 공단의 창업지원을 받아 대구 방촌시장에 ‘그 곳에 가면’을 열었다. 개업식에 참석했던 금두수 대리는 뿌듯한 마음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 정말 제가 다 벅찼어요. 사실 많은 분들이 산재를 겪고 재활훈련을 받지만 거기서 그치는 경우가 많거든요. 서정백 씨는 처음부터 의지가 남달랐던 분이지만 이렇게 창업에 성공하셨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분이시죠. 앞으로 더, 더, 더! 발전하시기를 응원합니다.”
칼을 잡고, 팬을 들고 직접 요리를 하는 서정백 씨는 음식을 할 때 행복하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게에 들어와서 음식을 먹고 나면 손님들의 마음이 따뜻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동네에서 그래도 그 집에 가면 음식은 먹을 만해, 거기 가면 마음 편하게 술 한 잔 할 수 있어, 하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터뷰가 마무리될 때쯤 금두수 대리의 승진 소식이 전해졌다. 서정백 씨의 바람대로 그곳에 가면 좋은 일이 벌어진 걸까?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은 걸까?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을 향해 세상으로 걸어가는 서정백 씨는 다시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