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같이 해봅시다
- 기억에 남은 말 한마디
6·25 전쟁 이후 1957년도 2월에 경북 문경에 유엔한국재건단에서 시멘트 공장을 짓기로 하였다. 전체 공정은 덴마크의 FL SMIDTH사에서 낙찰을 받았고, 발전기는 스웨덴, 발전용 보일러는 영국에서 수주했다. 그렇게 해서 거의 건설이 완공되어 갈 즈음, 나는 형님의 소개로 그곳 자재창고에서 서기로 일을 하게 됐다.
곧 준공이 다가오는 때여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내가 맡은 창고의 기계 부속품에 붙일 태그를 수동타자기로 치면서, 퇴직한 동료의 일까지 해야 해서 두 배로 빨리 일을 해야 했다.
하루는 실험실의 요겐 타일 씨가 창고 책임자인 덴마크인과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것을 슬쩍 보았다. 며칠 후 나의 상사인 손더 가드 씨가 나를 불렀다. 실험실로 전근을 가야 하니 내일부터는 타일 씨가 있는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실험실로 출근은 하였으나 문과생인 나에게 시멘트를 만드는 실험실의 일은 생소하기만 했다. 시멘트 제조 공정의 중요한 일지를 쓰고, 전체 생산일보를 작성하는 일이 주임무였다. 생산일보는 담당자인 타일 씨가 직접 챙기는 일이었다. 타일 씨가 생산일보를 작성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걸 보고는 덜컥 겁이 났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 오전에 사표를 써서 타일 씨의 책상 위에 두고, 오후에는 사전과 개인 물건을 챙기러 갔다.
곧 준공이 다가오는 때여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내가 맡은 창고의 기계 부속품에 붙일 태그를 수동타자기로 치면서, 퇴직한 동료의 일까지 해야 해서 두 배로 빨리 일을 해야 했다.
하루는 실험실의 요겐 타일 씨가 창고 책임자인 덴마크인과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것을 슬쩍 보았다. 며칠 후 나의 상사인 손더 가드 씨가 나를 불렀다. 실험실로 전근을 가야 하니 내일부터는 타일 씨가 있는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실험실로 출근은 하였으나 문과생인 나에게 시멘트를 만드는 실험실의 일은 생소하기만 했다. 시멘트 제조 공정의 중요한 일지를 쓰고, 전체 생산일보를 작성하는 일이 주임무였다. 생산일보는 담당자인 타일 씨가 직접 챙기는 일이었다. 타일 씨가 생산일보를 작성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걸 보고는 덜컥 겁이 났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 오전에 사표를 써서 타일 씨의 책상 위에 두고, 오후에는 사전과 개인 물건을 챙기러 갔다.
하지만 잔뜩 얼어붙은 나를 맞아주는 타일 씨는 온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고는 “나하고 다시 해봅시다”하며 나를 달랬다
영국 대학 출신의 덴마크 최고 기술자(보증운전 책임자)인 타일 씨의 처지에서 보면 걸음마를 떼는 아기 같은 나에게 짜증이 날 만도 하련만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그렇게 실험실에 머물게 되었고, 1년여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시멘트 제조 공정의 문외한이었던 내가 보증운전 기술자의 보조원이 될 정도로 전문가가 되었다. 보증운전이 끝난 후 타일 씨는 본국으로 귀국하였고 나는 생산부장의 보조원으로 계속 일을 하였다. 공대 출신 동료들조차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 타일 씨는 언제나 나를 ‘동료 일꾼’이라고 칭해주었고 그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은 나를 발전시키는 시간이었다.
아직도 그와의 시간은 나에게 소중함으로 기억된다. 기억에 남는 여러 가지 영국 신사의 말이 있었으나 그중에서 나를 안심시키고, 안정을 찾아준 고마운 것은 웃으면서 해준 “다시 같이 해봅시다”라는 말이다. 평생 잊지 못할 말씀이었고, 무능한 나에게 힘을 주는 말이었다.
아직도 그와의 시간은 나에게 소중함으로 기억된다. 기억에 남는 여러 가지 영국 신사의 말이 있었으나 그중에서 나를 안심시키고, 안정을 찾아준 고마운 것은 웃으면서 해준 “다시 같이 해봅시다”라는 말이다. 평생 잊지 못할 말씀이었고, 무능한 나에게 힘을 주는 말이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늘 그의 넓은 아량과 따뜻한 말 한마디는 아직도 나의 가슴에 울림으로 남아 있다 . 우리, 같이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