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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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오드퍼퓸의
기억을 새길 시간
나만의 향수 만들기
‘존재하는 모든 것은 향기가 있다. 향기는 그 사람의 영혼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소설 <향수>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향기로 존재를 증명한다고 했다. 숨결처럼 지문처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체성으로 향기를 정의 내린 것이다. 사람은 향수를 뿌리든 안 뿌리든 자신만의 향기를 가진다. 자신만 모를 뿐이다.

그래서 가끔은 욕심을 내본다. 내 향기를 스스로 선택하기로.

글. 차유미 / 사진. 김근호

향수 아웃사이더들의 과감한 일탈
2017년 1월에 입사한 동기이자 사내 홍보단의 단장과 부단장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두 사람이 나만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서울 북촌을 찾았다. 북촌은 이제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을 만나도 자연스럽고, 한옥이 향수를 품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곳이 됐다. 이에 멋스러운 한옥집에 통유리로 인테리어 된 이곳은 향수를 만들기 딱 좋은 곳이 아닐 수 없다.
“여기 진짜 예뻐요. 향수 만들기도 왠지 성공할 것 같은데요. 사실 전 향수를 사용하지 않아요. 사서 쓰는 향수는 향기가 비슷비슷하고, 여러 사람이 모이면 냄새가 짙어지는 게 부담돼서요. 그런데 문득 나한테 맞는 향수라면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저는 비누 향이나 꽃향기 정도면 충분하거든요.”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는 서울관악지사 박철지 주임이 향수 만들기에 선뜻 참여하기로 한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함께 참여한 동기 의정부지사 양제웅 주임 역시 냄새에 예민하다 보니 악취는 물론 진한 향수도 거부감이 든다며, 은은한 보디 스프레이 정도의 수준으로 향수를 제조할 수 있다는 동기의 말에 고민 없이 “ok”를 외쳤다고 한다. 실제 이들이 만들 오늘의 향수는 향기가 짙은 ‘퍼퓸’보다 한 단계 연한 ‘오드퍼퓸’으로, 출근 전 향수를 뿌리고 나오면 오후 1시 쯤엔 잔향만 살짝 남는 정도의 딱 적당한 타입이다.
“전 상쾌하고 무겁지 않은 향을 좋아해요. 처음 맡았을 때도 싱그러웠으면 좋겠고, 은근한 향이 오래 가는 걸 더 좋아하죠. 은은하면서도 개성 있는 나만의 향수를 만들 겁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향수 중에 제 마음을 사로잡은 건 아직 없거든요.” 향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두 사람은 과연 오늘의 체험으로 향수에 입문할 수 있을까?
선택과 조화 사이의 오묘한 차이
드디어 향수 만들기가 시작됐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고민이 그들 앞에 놓였다.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향을 선택하는 일. 향수는 톱-미들-베이스 노트의 3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톱 노트는 향수를 뿌렸을 때 가장 먼저 나는 향으로, 향수의 첫인상을 결정한다. 이후 금방 사라지며 미들 노트가 나타나는데, 향수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결정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건 베이스 노트로, 가장 오래 잔향을 풍기기에 그만큼 오래 맡고 싶은 향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좋아하는 하나의 향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3가지의 향을 선택하되, 한꺼번에 맡았을 때 자연스러운 느낌이 나야 하기 때문이다.
“향수를 살 때 매장에서 맡았던 향과 집에 와서 맡는 향이 왜 달랐는지 이제야 미스터리가 풀리네요.” 향수의 반전 비밀을 이제야 알게 됐다는 박철지 주임은 시작부터 흥미롭다며 향수의 세계에 입문한 보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좋아하는 향만 골랐는데도 섞어놓으니 어딘가 어색해요. 역시 향수는 조합이군요. 각기 좋은 향을 풍기면서도 서로 궁합이 맞는 향을 고르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양제웅 주임도 한마디 거든다. 게다가 조합을 맞추기 위해 펼쳐놓은 30가지나 되는 향기 오일을 이렇게 저렇게 맡다 보니 코가 얼얼할 정도. 잠시 커피콩의 향을 맡으며 후각을 정화해보지만, 금세 흩어져 있는 향기에 도취되고 만다.
이젠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서로에게 대신 맡아달라고 하기도 하고, 강사에게 향이 조화로운지 묻기도 한다. 그렇게 조화로운 향을 고르는 데만 30여 분이 흘렀다.
결국 오랜 고심 끝에 두 사람은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박철지 주임은 비누 향의 스파를 베이스로, 꽃향기 가득한 매그놀리아를 미들로, 여성스러운 스위트시트러스를 톱으로 선택. 3가지를 한꺼번에 맡아보니 달콤한 비누 향이 향기롭다. 양제웅 주임은 은은하면서도 개성을 살리고 싶어한 만큼 이색적인 집시 소울을 베이스로, 깔끔한 피오니를 미들로, 풀 향기 가득한 베르가모트를 톱으로 선택. 함께 맡아보니 오묘한 풀 향기가 무척이나 싱그럽다.
향수에 담긴 웃음과 추억
그럼 이제 성공?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이제 두 번째 관문, 비율 조절이 남았다. 오래 쓸 향수니만큼 샘플을 먼저 만들어 조합이 적절한지 살펴보기로 한다. 강사의 조언에 따라 작은 샘플병에 스포이트로 한 방울, 두 방울 비율을 조절해 조심스레 떨어뜨린다. 한 방울의 차이로 향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알기에 조심스러운 손길은 어느새 떨리고 있다. 초집중하며 손을 덜덜 떠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후각의 기억은 다른 감각보다 오래 머물러요. 지금처럼 웃으면서 향수를 만들면, 나중에 사용할 때마다 즐거웠던 기분이 기억날 거예요.” 강사의 말이 마치 내일의 행복을 예언하는 듯해 좋은 점괘를 들은 것처럼 기분까지 좋아진다. 이제 제조한 향기를 심사할 차례. “우와~ 완전 제 스타일이에요. 한 번 맡아보세요. 저만 좋은 거 아니죠?” 원하는 향기가 퍼지자 신기한 듯 두 사람 모두 자신만만해진 목소리를 한껏 높인다. 그리곤 샘플 비율을 그대로 가져와 본격 향수 만들기에 돌입한다.
향수의 용량이 커진 만큼 이번엔 향기 오일을 듬뿍 담아주어야 한다. “아까처럼 떨면 안 돼요. 이번엔 과감하게 부어주세요.” 강사의 말에 굳은 결심을 한 듯 쪼로록 향기 오일 흐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그토록 오래 향을 고르고, 조심스레 비율을 조절하고 나자, 마술처럼 텅 빈 향수병에 나만의 향기가 가득 찼다. 뚜껑을 덮고 라벨을 붙이고 박스로 감싸고 나니 백화점 향수가 따로없다. 어두운 곳에서 2주 숙성 후 더 은은하고 더 세련된 향으로 거듭날 세상 어디에도 없을 향수. 이제 매일 오후 1시면 이들의 향기가 기분 좋게 스며들 것이다. 나도 모르게 좋은 기억을 가득 채울 향기, 그 속에는 오늘의 웃음과 추억도 함께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