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 바다향 머무는 고택
강릉(江陵) - 역사가 있는 여행
강릉에서는 오랜 서성거림이 즐겁다. 해변을 거닐면 파도 소리 너머 고즈넉한 고택이 배경이 되고,
갓 볶은 코스타리카 커피 향이 코끝을 감싼다. 강릉의 가옥과 바다, 먹을거리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강릉에는 은은한 커피 향처럼 여운을 남기는 운치 있는 공간들이 많다. 광활한 바다와 따뜻한 한옥이 대비를 이루는 반전은 강릉 나들이의 묘미다. 예부터 ‘동대문 밖 강릉’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릉은 서울 동쪽으로 가장 번성한 고장이었다. 선교장, 오죽헌 등은 그 윤택함에 기댄 강릉의 고택들이다.
경포대 앞 선교장은 영동지방 최고의 한옥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300여 년 동안 원형이 보존된 사대부가의 전통 가옥은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에 의해 처음 지어졌으며 10대에 걸쳐 증축됐다. 우리나라 민가 중 최초로 중요민속자료(5호)로 선정된 국가지정문화재이기도 하다. 선교장은 123칸 규모의 살림집을 보존하고 있는데 민가의 법도인 99칸을 넘어서 국내 최대 규모 한옥이 됐다. 집 안 곳곳 대문만 12개다. 꿈속 족제비가 점지해준 명당에 집을 지은 전설을 쫓아 아직도 이 일대의 족제비들은 영물로 대접받는다.
경포대 앞 선교장은 영동지방 최고의 한옥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300여 년 동안 원형이 보존된 사대부가의 전통 가옥은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에 의해 처음 지어졌으며 10대에 걸쳐 증축됐다. 우리나라 민가 중 최초로 중요민속자료(5호)로 선정된 국가지정문화재이기도 하다. 선교장은 123칸 규모의 살림집을 보존하고 있는데 민가의 법도인 99칸을 넘어서 국내 최대 규모 한옥이 됐다. 집 안 곳곳 대문만 12개다. 꿈속 족제비가 점지해준 명당에 집을 지은 전설을 쫓아 아직도 이 일대의 족제비들은 영물로 대접받는다.
추사 김정희도 즐겨 찾던, 선교장 활래정
선교장은 가장 오래된 안채, 사랑채인 열화당, 서재로 활용하던 서별당의 건축양식이 각각 다르다. 마루가 높고 마당이 널찍한 열화당은 개화기 때 서양문물의 영향을 받은 차양을 고스란히 남겨뒀다. 열화당에는 외부 손님이 끊이지 않았으며 동으로 된 차양은 구한말 이곳에 머물렀던 러시아 공사가 1815년 선물로 지어준 것이다. 열화당에는 ‘기쁘게 이야기하는 집’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선교장 사랑채로 들어서는 대문은 꽤 높은 솟을대문이다. 가마에서 내리지 않고 대문을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구조다. 솟을대문 위에는 ‘선교유거(仙橋幽居)’라고 적혀 있는데 ‘신선이 머무는 그윽한 곳’이라는 의미로 조선 말 서예가인 소남 이희수의 작품이다.
솟을대문 옆의 평대문은 여인과 아이들이 드나들도록 지었다.
선교장의 사랑채와 안채는 출입문이 분리돼 있다. 열화당, 활래정 등 손님 맞이에는 넉넉하면서도 안채는 꼭꼭 숨겨두었다. 안이 보이지 않도록 안채의 내벽, 외벽을 겹겹이 싼 구조는 문화재로 지정된 주된 이유였다. 선교장의 연못 옆 정자인 활래정은 경포호의 정자이자 선교장의 수려한 공간으로 사랑받는 곳이다.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등 시인, 묵객들은 이곳에서 경포호를 바라보며 차 한잔 마시는 여유를 마다하지 않았다. 예전 선비들은 배로 만든 다리인 ‘선교’를 넘어 경포호에서 활래정을 드나들었다. 활래정의 기둥은 절반은 연못에, 절반은 마당에 걸쳐 있는 모양새다. 흡사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을 닮았다. 선교장에서는 요즘도 차 한잔 기울이며 하룻밤 묵어가는 풍류가 가능하다. 언덕 위 노송숲 산책은 수백 년 고택 나들이의 호사스러움을 더한다.
솟을대문 옆의 평대문은 여인과 아이들이 드나들도록 지었다.
선교장의 사랑채와 안채는 출입문이 분리돼 있다. 열화당, 활래정 등 손님 맞이에는 넉넉하면서도 안채는 꼭꼭 숨겨두었다. 안이 보이지 않도록 안채의 내벽, 외벽을 겹겹이 싼 구조는 문화재로 지정된 주된 이유였다. 선교장의 연못 옆 정자인 활래정은 경포호의 정자이자 선교장의 수려한 공간으로 사랑받는 곳이다.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등 시인, 묵객들은 이곳에서 경포호를 바라보며 차 한잔 마시는 여유를 마다하지 않았다. 예전 선비들은 배로 만든 다리인 ‘선교’를 넘어 경포호에서 활래정을 드나들었다. 활래정의 기둥은 절반은 연못에, 절반은 마당에 걸쳐 있는 모양새다. 흡사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을 닮았다. 선교장에서는 요즘도 차 한잔 기울이며 하룻밤 묵어가는 풍류가 가능하다. 언덕 위 노송숲 산책은 수백 년 고택 나들이의 호사스러움을 더한다.
현모양처보다 예술가, 신사임당의 오죽헌
경포호를 사이에 두고 선교장과 담장을 나란히 한 공간이 오죽헌이다. 오죽헌(보물 165호)은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다. 신사임당은 홀로 남은 친정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 강릉에 기거하다 율곡을 낳았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별당 건물로 이곳 몽룡실이 율곡이 태어난 방이다. 율곡은 외갓댁에서 여섯 살 때까지 머물렀는데 조선 전기만 해도 친정에서 자식을 키우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세습 역시 딸에게 고루 분배됐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 이전에 그림, 자수, 시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어숙권의 수필집인 <패관잡기>에는 “동양에 신씨가 있다. 포도그림과 산수화는 한때 최고였다. 비평가들은 그녀를 안견 다음가는 인물로 손꼽았다”고 평하고 있다. 신사임당은 학식과 재능이 뛰어나며 자존감이 강했다. 성공한 남자, 율곡의 어머니 이전에 본인 자체로 품격이 빛났다.
율곡 이이는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사상가이자 철학자였다. 역사적 유래만큼이나 생활 속 인물로 그들의 모습은 살갑다. 5만원권에는 신사임당의 초상화와 포도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5,000권에는 이이의 초상화와 오죽헌, 오죽이 도안돼 있다. 오죽헌에는 600년 세월을 간직한 것이 세 가지다. 오죽헌 건물과 배롱나무, 율곡매다. 오죽헌 옆에는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율곡매가 심어져 있는데 신사임당이 그린 매화도와 율곡이 쓰던 벼루 장식의 소재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율곡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 툇마루에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새겨진 사랑채 등이 두루 둘러볼 곳이다. 오죽헌 주변으로는 ‘오죽(烏竹)’의 유래가 된 검은 대나무가 자란다. 오죽헌의 오죽은 다른 지역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별당 건물로 이곳 몽룡실이 율곡이 태어난 방이다. 율곡은 외갓댁에서 여섯 살 때까지 머물렀는데 조선 전기만 해도 친정에서 자식을 키우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세습 역시 딸에게 고루 분배됐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 이전에 그림, 자수, 시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어숙권의 수필집인 <패관잡기>에는 “동양에 신씨가 있다. 포도그림과 산수화는 한때 최고였다. 비평가들은 그녀를 안견 다음가는 인물로 손꼽았다”고 평하고 있다. 신사임당은 학식과 재능이 뛰어나며 자존감이 강했다. 성공한 남자, 율곡의 어머니 이전에 본인 자체로 품격이 빛났다.
율곡 이이는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사상가이자 철학자였다. 역사적 유래만큼이나 생활 속 인물로 그들의 모습은 살갑다. 5만원권에는 신사임당의 초상화와 포도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5,000권에는 이이의 초상화와 오죽헌, 오죽이 도안돼 있다. 오죽헌에는 600년 세월을 간직한 것이 세 가지다. 오죽헌 건물과 배롱나무, 율곡매다. 오죽헌 옆에는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율곡매가 심어져 있는데 신사임당이 그린 매화도와 율곡이 쓰던 벼루 장식의 소재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율곡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 툇마루에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새겨진 사랑채 등이 두루 둘러볼 곳이다. 오죽헌 주변으로는 ‘오죽(烏竹)’의 유래가 된 검은 대나무가 자란다. 오죽헌의 오죽은 다른 지역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틋한 시인 허난설헌과 초당 두부마을
신사임당과 사연을 달리한 ‘강릉의 여인’은 허난설헌이다. 신사임당과 율곡의 삶이 윤택했다면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의 삶은 애틋했다. 신사임당과 60여 년 차이로 강릉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허난설헌은 시에 능했으며 20대에 세상을 떠났다. ‘난설헌’은 그녀의 호이자 생가의 이름이기도 하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다.
허난설헌은 시에 탁월한 재주를 지녔지만 여인의 시작 활동은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허난설헌은 결혼한 뒤 두 딸을 잃고 그 슬픔을 시에 담기도 했으며 27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초당마을 인근에는 허균, 허난설헌의 생가터를 복원한 한옥이 마련돼 있다.
생가터 인근에는 순두부로 명성 높은 초당마을이 자리했다. 이곳 초당동 사람들이 순두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문헌을 살펴보면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부친인 허엽이 집 앞 샘물로 콩물을 만들고, 바닷물로 간을 맞춰 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두부 맛이 좋아 자신의 호인 ‘초당’이란 이름을 붙여 초당두부의 명칭이 시작됐다고 한다. 두부를 만들었던 샘물이 있던 자리가 바로 초당마을인 셈이다.
이곳 식당들은 바닷물을 간수로 쓰고 국산콩을 이용해 두부를 제조하는 전통 방식을 여전히 고집스럽게 고수한다. 솔숲이 우거진 초당동 두부마을에는 대를 이어 순두부집을 이어오는 식당 등이 20곳 가까이 들어서 있다. 영업은 딸이나 며느리가 하더라도 순두부를 직접 만드는 일은 등이 굽은 할머니가 직접 나선다. 이곳 식당들의 이름에 ‘고부’ 또는 ‘할머니’ 등의 이름이 흔하게 들어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할머니들이 두부를 만들게 된 실제 사연은 오히려 담백하다. 할아버지가 콩 농사를 지었는데 시장에 내다 팔면 콩은 별로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콩 대신 두부를 만들어 인근 강릉 시장에 내다 팔았단다. 할머니들이 가마솥에서 순두부를 끓여내는 모습은 강릉 해변의 훈훈한 새벽 풍경을 만들어낸다.
강릉의 고고함은 고택 위에 이국적인 유물들이 덧씌워져 운치를 더한다. 요즘 강릉에는 갓 내린 드립커피 한잔을 위해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노천 카페나 솔숲 벤치에 앉아 커피 한잔 즐기는 풍경은 어느덧 익숙해졌다. 굳이 커피 산지인 에티오피아, 코스타리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순간만은 모두 바다 향 깃든 ‘강릉 커피’다. 강릉을 ‘커피 1번지’의 반열에 올린 데는 커피 박물관이 일조한다. 왕산면과 강문해변에 문을 연 커피 박물관은 최초의 커피제국인 오스만튀르크의 커피, 평생 5만 잔의 커피를 마셨다는 프랑스의 문학 거장 발자크의 커피 추출도구, 고종이 인절미와 함께 즐겼다는 ‘양탕국’ 커피 등 7,000여 점의 커피 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안목, 강문해변은 커피 붐과 함께 덩달아 분주해진 바다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다.
허난설헌은 시에 탁월한 재주를 지녔지만 여인의 시작 활동은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허난설헌은 결혼한 뒤 두 딸을 잃고 그 슬픔을 시에 담기도 했으며 27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초당마을 인근에는 허균, 허난설헌의 생가터를 복원한 한옥이 마련돼 있다.
생가터 인근에는 순두부로 명성 높은 초당마을이 자리했다. 이곳 초당동 사람들이 순두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문헌을 살펴보면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부친인 허엽이 집 앞 샘물로 콩물을 만들고, 바닷물로 간을 맞춰 두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두부 맛이 좋아 자신의 호인 ‘초당’이란 이름을 붙여 초당두부의 명칭이 시작됐다고 한다. 두부를 만들었던 샘물이 있던 자리가 바로 초당마을인 셈이다.
이곳 식당들은 바닷물을 간수로 쓰고 국산콩을 이용해 두부를 제조하는 전통 방식을 여전히 고집스럽게 고수한다. 솔숲이 우거진 초당동 두부마을에는 대를 이어 순두부집을 이어오는 식당 등이 20곳 가까이 들어서 있다. 영업은 딸이나 며느리가 하더라도 순두부를 직접 만드는 일은 등이 굽은 할머니가 직접 나선다. 이곳 식당들의 이름에 ‘고부’ 또는 ‘할머니’ 등의 이름이 흔하게 들어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할머니들이 두부를 만들게 된 실제 사연은 오히려 담백하다. 할아버지가 콩 농사를 지었는데 시장에 내다 팔면 콩은 별로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콩 대신 두부를 만들어 인근 강릉 시장에 내다 팔았단다. 할머니들이 가마솥에서 순두부를 끓여내는 모습은 강릉 해변의 훈훈한 새벽 풍경을 만들어낸다.
강릉의 고고함은 고택 위에 이국적인 유물들이 덧씌워져 운치를 더한다. 요즘 강릉에는 갓 내린 드립커피 한잔을 위해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노천 카페나 솔숲 벤치에 앉아 커피 한잔 즐기는 풍경은 어느덧 익숙해졌다. 굳이 커피 산지인 에티오피아, 코스타리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순간만은 모두 바다 향 깃든 ‘강릉 커피’다. 강릉을 ‘커피 1번지’의 반열에 올린 데는 커피 박물관이 일조한다. 왕산면과 강문해변에 문을 연 커피 박물관은 최초의 커피제국인 오스만튀르크의 커피, 평생 5만 잔의 커피를 마셨다는 프랑스의 문학 거장 발자크의 커피 추출도구, 고종이 인절미와 함께 즐겼다는 ‘양탕국’ 커피 등 7,000여 점의 커피 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안목, 강문해변은 커피 붐과 함께 덩달아 분주해진 바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