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생애
두 번째 결혼식 - 창원병원 환자 이야기
제가 처음 결혼한 남자는 한마디로 ‘바깥양반’이었습니다. 그는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 봉사활동을
활발히 했습니다. 성실한 성격이라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남자였어요. ‘바깥양반’이라는
말 그대로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바깥양반은 회사에서 크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절단 기계를 점검하고 청소하던 날, 바닥에 고인 물을 밟고 미끄러지고 만 것입니다.
“넘어질 때 절단 기계의 작동장치 버튼이 눌렸나 봐요. 그 바람에 절단 기계에 쌓여 있던 물체가 이동하면서 왼쪽 어깨와 팔을 다친 모양이고요. 수술 잘 끝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환자분의 뼈를 이식해서 어깨와 팔을 연결하는 수술을 하게 될 겁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만 머릿속을 뱅뱅 맴돌 뿐이었지요. 수술 후, 바깥양반은 손으로 물건을 집는 일도, 걷는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재활치료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창원까지 찾아왔지만, 회복 속도는 여전히 더디기만 했습니다. 마음의 병이 원인이었습니다.
“넘어질 때 절단 기계의 작동장치 버튼이 눌렸나 봐요. 그 바람에 절단 기계에 쌓여 있던 물체가 이동하면서 왼쪽 어깨와 팔을 다친 모양이고요. 수술 잘 끝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환자분의 뼈를 이식해서 어깨와 팔을 연결하는 수술을 하게 될 겁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만 머릿속을 뱅뱅 맴돌 뿐이었지요. 수술 후, 바깥양반은 손으로 물건을 집는 일도, 걷는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재활치료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창원까지 찾아왔지만, 회복 속도는 여전히 더디기만 했습니다. 마음의 병이 원인이었습니다.
온갖 걱정이 바깥양반을 덮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우울감을 호소했습니다. 누구보다 활발히 사회활동을 했던 그에게 병원 생활은 감옥과도 같았으니까요.
다행히도 불행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얼른 회복해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병원에서 다방면으로 지원해주었거든요. 사회심리재활프로그램, 희망찾기프로그램 등에 참여하면서 바깥양반은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불행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얼른 회복해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병원에서 다방면으로 지원해주었거든요. 사회심리재활프로그램, 희망찾기프로그램 등에 참여하면서 바깥양반은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이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바로 그때, 바깥양반은 로맨티스트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다친 후부터 내내 자신의 곁을 지키고 보살펴준 사람은 직장 동료도, 친구도, 선배도, 후배도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요. 얼마 전, 저는 로맨티스트로 다시 태어난 이 남자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아들의 손을 잡고, 병원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말입니다. 손님을 초대한 것도 아니고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남긴 정도였지만, 저는 두 번째 결혼식을 평생 잊지못할 겁니다. ‘남편’이 아니라 ‘내 편’이 된 이 남자와 살아갈 앞으로가 얼마나 기대되는지 몰라요.
편집자 주. ‘고마운 당신’에 실린 이야기는 공단 병원을 이용한 고객의 사례를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