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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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숨죽여 흐느끼는
당신에게
최송연 씨와 박정희 과장이 전하는 이야기
끝이 보이지 않는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 한 여인이 홀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지독한 갈증으로 정신을 잃을 무렵, 누군가 다가와 물 한 모금 내어주며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아시스까지 함께 걷기를 청한 길잡이와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선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글. 김하늘 / 사진. 김재룡, 성민하

화상 전문병원을 찾던 문제의 그날
가만히 있으면 병나는 사람. 인터뷰하는 동안 최송연 씨에게 받은 인상이다.
오랜 세월 동안 매운탕, 족발, 백반 등 여러 음식점을 운영하며 남들보다 바지런하게 생활하던 것이 몸에 밴탓이다.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던 음식점을 접고 요양병원에 조리사로 취업해 일하던 중 ‘문제의 그날’을 맞게 됐다. 요양병원에서 일한 지 2년여 만인 2017년 8월 12일, 양쪽 어깨에 심한화상을 입게 된 것이다. “환자분들 식사를 옮기는 밥 차가 눈에 띄기에 약품을 가져와 열심히 닦기 시작했어요. 음식을 옮기는 장비가 깨끗해야 환자분들께 더 청결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어요.” 불행은 요양병원에서 밥 차를 닦을 때 사용하라고 지정해준 약품 때문에 발생하고 말았다. 밥차를 닦을 때 옷에 묻은 약품이 몸에 닿아 화학적 화상을 입고 만 것이다.
“한참 동안은 아픈지도 몰랐어요. 저녁에 샤워하다 보니, 피부가 빨갛게 다 쓸려 있더라고요. 남편에게 보여주었더니, 당장 병원에 가자더군요. 부랴부랴 인근 병원에 갔는데 화상 정도가 심해서 그곳에선 치료할 수 없다며 화상 전문병원인 베스티안 부천병원에 가라고 했어요. 진료과장님이 제 상처를 보시더니 바로 수술해야 한다더군요.”
이튿날, 양어깨를 수술한 최송연 씨는 허벅지 피부를 떼어내 양쪽 어깨에 이식하는 대수술을 치렀다. 한 달 반 동안 입원해 몸을 회복하고, 두 달 반가량 통원치료를 받은 끝에 작년 12월 5일에 치료를 마쳤다.
마음의 갈증을 해소해준 사람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서서 내 힘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뎌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마주하고 변화를 이끌어낼 용기가 없는 사람은 누군가 도움을 주려 해도 외면하고 지레 포기해버리기 마련이니. 그런 의미에서 최송연 씨는 용기 있는 여인이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고 말씀드려도 참여할 의지가 없는 분들이 계세요. 여러 차례 설득해도 절대 행동하지 않는 그런 분들이요. 그런데 최송연 고객은 달랐어요. 병원에 방문해서 교육 프로그램을 설명해드렸더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당시 최송연 씨는 지독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 몸이 아픈 것은 차치하고, 산업재해를 입은 후부터는 집 밖에도 나가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집 안에 틀어박혀 있기만 했다. 수십 년을 일하던 사람이 바깥출입은커녕 거동조차 하지 않았더니, 몸무게도 20kg 가까이 불어났다.
“그 와중에 왼쪽 어깨 부위 상처가 재발했어요. 재수술해야 했지요. 이미 한 번 고통을 겪은 후라서 더 힘들었습니다. 다시 고통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 불면증에도 시달렸어요.어렵게 2차 수술을 끝낸 후, 상처를 회복하고 있던 차에 박정희 과장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밤낮없이 매일 통증에 시달리는 일이 너무도 지루했다는 최송연 씨. 평소 부지런하고 활력이 넘쳤던 그녀는 “고통으로 인해 자신을 잃어가는 상황이 답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답답함을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어요. 더는 혼자 숨죽여 흐느끼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했던 그때, 박정희 과장님이 저를 찾아주신 거예요.” 첫 만남에서 최송연 씨는 옷을 벗어 박정희 과장에게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박정희 과장은 최송연 씨에게 ‘희망찾기프로그램’을 추천했다.
“병원에서 집중심리상담을 받으며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환자들과 서로 위로하고 토닥여주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어요. 가슴 속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기분이었지요.” 최송연 씨는 그날 병원에서 박정희 과장을 만난 건 ‘인생의 행운’이라 말하며 빙긋 웃었다.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최송연 씨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데 그치지 않고 박정희 과장에게 한 통의 편지를 적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그를 통해 얻게 된 것.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환자들이 더는 망설이지 않고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읽고 감동한 박정희 과장은 최송연 씨에게 가족화합프로그램 참여를 권유했다. 경북 영주에 있는 국립산림치유원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화합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마련된 프로그램이었다.
“사고를 겪고 난 후 처음으로 떠난 여행이었어요. 집 밖을 나설 때라곤 병원 갈 때뿐이었는데 말이에요.” TV도 에어컨도 없는 숲속. 그곳에서 최송연 씨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9팀의 가족과 어울리고, 부부 심리상담에 참여하며 남편과 시간을 보냈다. 사고를 입은 그날 이후, 자신만큼이나 힘들었을 남편의 마음을 오롯이 이해하게 된 날이었다. 그래서 최송연 씨는 국립산림치유원에 다녀오고 나서,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또 한 통의 편지를 썼다. 2박 3일간의 소중하고 귀했던 그 시간을 떠올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