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읽어드립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 게랄트 휘터 <존엄하게 산다는 것>

sub_writer_deco한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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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하게 산다는 것>은 독일의 뇌과학자이자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꼽히는 게랄트 휘터가 지은 책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풍기는 첫인상처럼 다소 무겁고 딱딱하다. 호흡이 짧은 시대, 자극적인 동영상이 득세하는 시대에 ‘존엄’이라는 단어를 깊게 음미해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엄하게 산다는 것>이 독일에서 반 년 넘게 베스트셀러의 최상단 자리를 지켰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가 몇 백 명의 청중들 앞에서 진행되는 토론회에 참석한 자리였다. 발언이 끝나갈 때쯤 휘터는 갑자기 예정에 없던 충동이 일어 대뜸 옆자리에 패널로 참여한 대기업 CEO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스스로의 존엄함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당신은 눈앞의 이익과 개인의 존엄 앞에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CEO는 당황했다. 커다란 이익과 자신의 존엄, 둘 중에서 무엇을 택하겠느냐는 질문 앞에서 그 CEO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침묵이 좌중을 압도했고, 곧이어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흔하게 스스로의 존엄함을 놓치고 살아왔는지를 일깨운 순간, 사람들은 무의식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존재의 진동을 느끼고는 벅찬 감동에 젖었던 것이다. 이 경험으로 게랄트 휘터는 우리가 본래 가진 존엄을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한
혹은 자기 자신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바로 그 안에 인간의 존엄함이 있다.
사실 ‘인간의 존엄’이라는 말 자체는 낯선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그 존재 가치가 있으며, 마땅히 인격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배운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에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렇기에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구현되지는 못하고 있더라도 적어도 존엄성 자체를 드러내놓고 부인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혹시 있더라도 그 인격과 사고방식을 의심받는다. 국민을 ‘개돼지’라고 지칭해서 논란이 된 어느 공직자의 사례처럼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존엄’은 적어도 서구 문명 역사에서는 그렇게 오래된 개념이 아니다. 플라톤을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은 존엄에 관심이 없었고,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복음을 가르친 예수 이후에도 존엄은 뿌리내리지 못했다. 신(神) 중심의 길고 긴 중세를 지나 18세기에 이르러서 칸트가 ‘인간성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도덕 법칙’을 절대적인 명령으로 선언한 다음에야 ‘존엄’의 가치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차 세계대전 이후 UN의 ‘세계 인권 선언’ 제1조에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라고 선포하면서 최소한 정치적, 법적으로는 존엄이 전 세계의 동의를 얻게 되었다.
자신의 존엄함을 인식한 사람은
자기 가치를 확인하려는 욕구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문제는 저 멀리 법적인 선언이 아니라, 일상에서 ‘존엄’을 우리가 생생하게 느끼고 경험하느냐다. 안타깝게도 그 답은 썩 만족스럽지 않다. 먹고 사는 것이 급하다는 이유로 바른 말을 해야 할 때 숨죽인 경험이 얼마나 되는가. 이익이 된다는 이유로 정직해야 할 때 타협한 경험이 얼마나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솔직한 답이 존엄에 대한 우리들의 현주소다.
게랄트 휘터는 말한다. 자신의 존엄성을 인식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자신의 존엄을 아는 사람은 이미 충만함 속에 산다. 그러므로 타인으로부터 더 큰 주목과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경쟁 속에서 남을 누르고 성공에 집착할 이유가 없으며, 온갖 마케팅이 약속하는 상품의 대리 만족에 휩쓸리지 않는다. 이런 태도를 통해서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소모적인 인간관계, 더 나아가 환경 침해적인 경제 성장이 그 출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존엄하게 산다는 것>은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이 아니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담은 책이라고 게랄트 휘터는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뒤에 우리는 그 둘이 다르지 않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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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재우의 서재> 대표
유튜브 <재우의 서재>를 통해 감동 깊게 읽은 책을 나누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