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여행
팔담팔정의 풍류,
수려한 함양을 찾다
수많은 재야의 선비들을 길러내며 좌안동 우함양이라 칭송받았던 양반의 고장이 함양이다.
유학자 최치원이 백성들을 위한 일화가 남아있는 함양 상림을 비롯해
선비들의 꼿꼿한 기개가 서린 개평한옥마을 등에서 유학자들의 기풍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여덟 개의 못과 정자가 어우러져 있었다던 선비문화탐방로에서는 물과 나무가 자아낸
아름다운 풍경에 스며들고자 했던 조상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sub_writer_deco김그린 여행작가

 

천년의 사계가 쌓인 곳,
상림공원
함양에서 갈만한 곳 중 가장 일상적으로 사랑받는 공간을 고르자면 역시 상림공원이다. 함양 읍내에서 차로 5분 거리기도 하지만, 한여름에는 햇빛이 땅에 닿지 않고 겨울에도 찬바람을 막아줄 수 있을 만큼 나무가 빽빽하기 때문이다. 이곳의 역사는 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 최치원이 함양 태수이던 시절, 물난리를 막기 위해 물길을 돌려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가꾼 대관림이 그 시초다. 세월이 지나며 대관림이 상림과 하림으로 나누어졌고 하림에는 마을이 형성되면서 옛 명맥은 상림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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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서로 붙어서 생긴 연리목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 길게 이어진다. 바로 맨발로 산책할 수 있는 다볕길이다. 함화루에서 숲이 끝나는 물레방아까지 약 1.2km가량의 거리로 조성되어 있어 부담스럽지 않은 것도 장점이다. 숲에 흐르는 실개천이나 함화루 근처에 마련된 발 씻는 곳에서 손발을 씻을 수 있어 의외로 맨발 걷기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정경도 상림을 계속 찾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여름에는 신록과 연꽃이 선비들의 풍류를 느끼게 하지만, 가을부터는 붉은 꽃무릇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사람들의 발걸음을 느리게 만든다. 나무의 수종은 500년 이상 가는 것이 드물어 계속 새로 심어왔지만, 신라시대의 임상과 크게 다른 점이 없어 그 당시의 풍광을 새롭게 느낄 수 있다. 이를 높이 사 2018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숲지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자연 속에
쏙 들어앉은 정자들,
선비문화탐방로
덕유산 자락에 있는 화림동 계곡은 얼음장처럼 차갑거나 폭포처럼 웅장한 곳은 아니다. 계곡과 소가 굽이굽이 어우러져 있는 이곳에서는 흐르는 물과 덕유산의 산세가 어우러져 눈과 귀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2003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농월정이 새롭게 단장해 2015년에 복원되면서 한층 빛을 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계곡물에 비친 달을 희롱할 수 있을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라 농월정이라는 짓궂은 이름이 붙었다. 정자 앞에 자리한 넓은 너럭바위는 풍류를 쫓아온 사람들을 넉넉히 품어줄 수 있어 많은 이들이 찾아와 쉬어간다. 근방에 오토캠핑장이 들어서면서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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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월정을 중심으로 선비문화탐방로는 2개 코스로 갈린다.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 약 6km에 달하는 1구간, 그리고 농월정에서 광풍루까지 달하는 4km가량의 2구간이다. 대부분의 길이 나무로 된 테크로 이루어져 있어 어렵잖게 걸을 수 있지만, 전 구간을 다 걷기 어렵다면 1구간의 일부분이라도 걸어보길 권한다. 거연정과 군자정, 동호정 등의 정자들이 각각 이색적인 매력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거연정은 남강천의 암반 위에 건립되어 자연 속에서 도드라지는 듯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여기에 유학자 정여창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군자정도 빠트리기 어렵다. 처가가 있는 주변 마을을 찾을 때마다 화림동 계곡을 즐겨 찾았던 것을 기리기 위해 19세기에 지은 정자다. 다른 정자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나무 사이로 화림동의 경치가 풍성하게 담겨 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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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여창의 흔적은 다른 누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선비문화탐방로의 2코스에 있는 광풍루다. 안의 현감으로 고향에 내려온 정여창이 당시 선화루로 불리던 누각을 중수한 뒤 이름을 고친 것이 광풍루다. 비 갠 날 청량하게 부는 바람과 상쾌한 달과도 같다는 뜻을 지닌 광풍제월에서 이름을 따와 붙이고, 이와 함께 짝을 이루는 제월당을 근방에 건립했다. 꼬불꼬불한 계곡을 지나 남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광풍루에는 우암 송시열의 광풍루기가 걸려있다. 당시 선비들이 이 일대를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서 높게 평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이기도 하다.
전통의 가치를 웅변하는 곳,
개평한옥마을과 남계서원
함양에서 일두 정여창의 흔적을 스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고단한 인생사로 인해 역사적으로도 많은 흔적이 남아있지만, 그의 학덕이 높았던 만큼 성리학사에서도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동방 5현으로 문묘에 모셔진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정여창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 남계서원이다. 조선시대에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았던 47개 서원 중 하나다. 남계서원을 비롯해 소수서원, 도산서원 등 대표적인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다시 한 번 역사성이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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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
개평한옥마을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저택인 일두고택도 정여창이 살았던 집터에 후손들이 중수를 하면서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일자 형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널찍하고 트인 듯한 느낌이 특징적인 곳으로 효자와 충신을 기리는 네 개의 정려문이 집안의 기풍을 보여준다. 한편 오담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등도 오랜 역사와 특징적인 건축 양식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더 매력적인 것은 90가구가 넘는 집에 주민들이 거주 중이라는 것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옥에서 사람이 살아가며 한 켜 한 켜 쌓아 올린 시간과 전통이 촉촉하게 전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