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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은 조선 시대 최고의 시인이자 사상가이며 철학자였다.
‘뒤로 물러나는 시냇물’이란 뜻의 ‘퇴계’처럼 그는 57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했다.
그는 도산서원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으며,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퇴계 예던길은 이황 선생이 진리를 찾아서 거닐던 철학자의 길이다.

글. 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퇴계 예던길, 인생의 시작과 끝이 만나는 길

퇴계 이황 선생은 1501년에 태어나 1570년에 생을 마감했다. 70년을 산 셈인데 당시 평균수명보다 훨씬 장수했다. 선생은 조선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교육자, 시인이며 정치인이었다. 화려한 이력을 가졌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선생은 정치인보다 철학자, 특히 성리학자로 더 잘 알고 있다. 선생은 긴 생애에 비해 관직 생활을 한 기간은 길지 않다. 중종 29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뒤 승진을 거듭했지만,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부모 봉양을 명분 삼아 낙향했다. 낙향 이후에도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번번이 이유를 들어 고사했다.
예던길은 선생이 아꼈던 길이다. ‘예던’이라는 말은 예다에서 나온 말로 ‘가던’ 또는 다니던’ 이란 뜻이 있다. 15세 때 숙부 송재 이우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청량산으로 가면서 처음으로 이곳을 걸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청량산에서 책을 읽고, 가는 길에 수많은 시를 남겼다. 훗날 사람들은 이 길을 예던길, 혹은 녀던길, 퇴계 오솔길이라 불렀다.
스스로 ‘청량산인’으로 부를 정도로 청량산을 사랑했던 선생은 이 길을 걸으며 깊은 사색에 잠겼으리라. 선생의 도산십이곡에 오랜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의 심정이 잘 나와 있다. 당시에 녀던길을 몇 해를 버려두고 / 어디 가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온고 / 이제야 돌아오나니 딴 데 마음 말리
- <도산십이곡>

예던길의 백미, 농암 종택

예던길로 가는 길은 차가 지나는 풍경부터 압권이다. 청량산 줄기를 가르며 낙동강 물길 따라가는 35번 국도는 주변 풍광이 한 폭의 한국화 같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알려져 있다. 미식 가이드북으로 유명한 미슐랭에서 관광지에 별점을 매기는 <그린가이드>에서 국내에서 유일하게 원스타 별점을 받은 곳이다. 예던길은 선생이 청량산에 가던 낙동강변 4~5km 구간에 숨어 있다. 길은 백운지교에서 출발해 학소대, 농암종택, 고산정까지 이어진다. 그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숲속 오솔길과 푸른 강이 절경이다. 그는 나귀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맑고 맑은 여울과 높고 높은 산이 끊임없이 사라졌다 다시 보이네’라며 풍경에 감탄했다.
예던길의 백미는 가송리 농암종택 일대다. 가송리는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다. 청량산의 기운을 그대로 이어받은 장군봉과 건지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골짜기 사이로 낙동강이 굽이져 흐른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켜온 깎아지른 단애, 소나무를 휘감는 바람 소리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의 울림, 은빛 반짝이는 모래사장, 현기증이 나도록 맑디맑은 강물. 모든 풍경이 조화로운 까닭에 곧추선 절벽의 모습에서 서늘한 기운마저 감돈다. 친근한 우리 산하의 풍경이지만 뭐하나 부족할 것 없을 정도로 충만해 보인다. 신록 짙은 여름날의 아름다운 자연이 펼치는 향연은 자연 속에 깃든 사람의 마음마저 맑고 밝게 만든다. 500여 년 전, 선생도 이 길을 오가며 아름다운 풍경을 시구에 담았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하리라
- <도산십이곡>
농암종택에서 챙겨볼 곳은 농암이 태어났다는 긍구당이다. 긍구당은 ‘조상의 유업을 길이 잇다’라는 뜻으로 현판은 조선 시대 명필 신잠(1491~1554)의 글씨다. 누마루에 오르면 나무 틈 사이로 예던길 자락이 보이고 낙동강 물소리가 들려온다. 긍구당을 나서서 강변 방향으로 가면 애일당에 닿는다.
애일당은 농암 선생이 부모님을 위해 지은 정자다. ‘애일’이란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부모님이 살아 계신 나날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농암 선생은 여기서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을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농암과 선생은 서른네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격의 없는 벗처럼 지냈다고 한다. 서로의 거처를 찾아 유상 곡주를 즐기고 학문적 교감을 나누며. 세대를 초월한 두 선생의 교제는 학자다운 반듯함과 문인다운 힘, 그리고 자연을 벗 삼아 즐길 줄 아는 진정한 풍류가 있다.

마음을 사로잡는 빼어난 풍경, 고산정

농암종택을 뒤로하고 낙동강을 한 굽이 돌면 가파른 산기슭에 정자 하나가 보인다.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였던 금난수(1530~1604)가 지은 고산정이다. 정유재란(1597년)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킨 금난수는 스승 퇴계 이황 선생을 쏙 빼닮았다. 최소한 벼슬을 마다하는 여유와 고산정을 짓고 일동정사라 부르며 학문을 향한 열의가 그렇다. 금난수는 스스로 고산주인이라 불렀다.
고산정은 팔작지붕을 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이다. 단출하다. 하지만 고산정이 앉은 자연의 품은 매우 높고, 깊고, 넓다. 바로 아찔하리만큼 곧추선 벼랑,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 넓게 펼쳐진 은빛 모래톱이 그렇다. 선생은 제자 금난수가 있는 고산정을 자주 찾아 노닐었다. 선생의 집이 있는 도산에서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찾거나 그저 고산정에 오고 싶어서 찾기도 했다지만 모름지기 빼어난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옮겨 왔을 듯하다. 외병산과 내병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절경을 바라보며 자연을 노래했을 것이다.
산 넘어 깊숙한 곳 별세계를 얻으니 / 경대와 요포에 지전이 비치는구나/ 옛날 와서 못 본 것을 이제 와서 보니/ 동천 속 선경을 직접 만난 듯
- <고산견금문원>
선생이 거닐었던 예던길은 500년 전과는 다를 것이다. 오랜 햇볕과 비바람으로 인해 풍경과 지형이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황의 옛 시구 속에 시대를 초월한 진실이 담겨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자연의 변함없는 아름다움과 진리를 향한 인간의 갈구일 것이다.

여행 정보

안동 향토음식 헛제삿밥은 양반가 제례음식을 나눠 먹었던 데서 유래했다. 서원의 유생들이 평소 먹기 어려웠던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한 핑계로 제례음식 헛제삿밥을 만들어 먹었다는 설이 있다. 입가심은 안동식혜가 좋다. 찹쌀 고두밥에 고춧가루, 무채, 생강채 등에 엿기름을 넣어 발효시킨 음식인데 매콤 새콤한 맛이 일품이다. 참고로 안동에서는 흔히 알고 있는 식혜를 단술이라 부른다.

내비게이션 정보

농암종택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62-133

문의

농암종택 054-843-1202
안동 관광 안내소 054-856-3013, 840-6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