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을 떠나보냈다.
그 이별이 후련한 사람도 있겠고 아쉬운 사람도 있을 거다.
모름지기 아쉽다면 지난여름 좋은 추억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성큼 다가온 가을, 선선한 가을바람과 함께 진정한 먹방의 계절이 찾아왔다.
빼어난 해안 절경을 감상하고 한식의 품격을 한껏 드높이는 굴비를 맛보기에 이만한 때가 없다. 전라남도 영광으로 떠난다.
글. 사진. 임운석(여행작가, 도서 <내가 선택한 최고의 여행> 작가)
백수해안도로 드라이브를 시작하며
전라남도는 우리나라 어느 곳보다 해안선 길이가 길고 경관이 우수하다. 걷기에도 좋고 드라이브를 즐기기에도 그만이다. 해변 역시 갯벌과 모래가 섞여 있어 지나치게 발이 빠지거나 미끄덩거리지도 않아서 걷기에도 수월하다. 국토해양부는 전남지역의 걷기 좋은 길 12곳을 선정해 해안누리길로 선정했다. 이로써 전남은 전국에서 해안누리길을 가장 많이 보유한 광역자치단체가 되었다. 그중 백수해안 해당화길은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에서 홍곡리까지 총연장 16.8km, 5시간 정도 소요되는 코스다. 무더운 여름에는 해당화길과 함께 이어진 백수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겨도 좋다. 마치 동해안의 일출을 방불케 하는 장엄한 노을을 볼 수 있는 노을전망대와 고운 백사장을 품고 있는 모래미 해수욕장, 갯바위가 절경을 만들어내는 칠산정 앞 해안, 바다와 강이 만나는 풍광이 이색적인 대초마을 등 눈을 즐겁게 할만한 포인트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하지만 16km가 넘는 비순환형이라는 점에서 멈칫하게 된다. 게다가 노선의 상당 구간이 차도로 구성되어 있어 보행에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비대면 여행이 일상이 된 요즘 백수해안 해당화길은 드라이브와 걷기를 동시에 즐길 수 있어 여행이 더 즐겁고 알차다.
백수해안도로는 영춘교를 지나면서부터 시작이다. 구불구불 굴곡진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어느새 법백교다. 다리 아래에 와탄천이 고요하게 흐른다. 와탄천은 내륙의 일반 천과 다르다. 검은 펄이 드넓다. 와탄천이 감싼 황강 들녘에는 푸른 벼들이 서서히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들녘은 이미 초가을이지만 도로 아스팔트 위는 아지랑이가 이글댄다. 와탄천을 사이에 두고 대덕산(240m)이 봉긋하다. 정상에 오르면 와탄천과 서해, 법성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친김에 법성포구로 향한다. 말도 살찌는 가을에 영광에 왔으니 굴비를 먹지 않고선 안될 일이 아닌가.
밥도둑의 레전드를 마주하다
법성포 굴비 거리는 장장 1.5km에 이른다. 한마디로 굴비 가게가 굴비 엮듯 줄지어 있다. 최소한 이 거리에서만큼은 ‘영광법성포굴비’는 절대 진리인 셈이다. 법성포는 고려 초기부터 조창(漕倉)이 있었다. 유형원이 쓴 <반계수록>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법성포 조창 관할 지역이 부안, 장성, 정읍, 고창, 순창, 고성 등 15개 고을에 이르렀고, 중기에는 호남 곡창지대에서 거둬들인 전세가 법성포에 집결했다고 한다. 또 법성포는 조기로 유명한 칠산바다의 기항지로써 선상에서 열리는 어시장인 파시(波市)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종이보다 돈이 더 흔하다고 했을까. 하지만 요즘 법성포는 시쳇말로 항구로써는 한물갔다. 매축한 이후 수심이 얕아진 데다 칠산바다에서 잡히던 조기도 씨가 말랐다. 그렇다면 법성포 굴비 맛도 예전만 못할까? 현지인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라고 입을 모은다. 이유는 굴비의 맛을 결정짓는 것은 조기의 원산지가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말리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즉, 조기를 건조한 굴비 맛은 건조와 염장법에 달렸다는 것. 또 굴비와 비슷하다고 오해하는 간조기는 조기와 완전히 다른 음식이다. 간조기는 소금 간을 한 뒤 꾸덕꾸덕하게 말리거나 물기를 뺀 것이다. 그러나 굴비는 소금에 사나흘 절인 조기를 보름 넘게 바짝 말린 뒤 통보리 속에 넣어 숙성한다. 이것이 보리굴비다. 보리굴비는 딱딱해서 쪄먹어야 맛있다. 굴비를 맛있게 먹는 방법은 간단하다. 찬물에 밥을 말아 굴비를 찢어 얹어 먹으면 그만이다. 짐작했던대로 보리굴비는 밥도둑이다. 밥 두 그릇을 비우고서야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거친 바다 앞에 멈춰서다
482번 도로를 따라 법성포를 빠져나온다. 백수해안도로로 넘어가는 언덕에 ‘숲쟁이꽃동산’이 있다. 숲쟁이는 ‘숲으로 된 곳’이라는 뜻이다. 가장 많은 수종은 느티나무다. 조선 중종 9년(1514)에 수군 기지인 법성진성을 축성하면서 적군을 방어할 목적으로 활엽수 위주로 심었다고 한다. 계산상으로 5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만, 실제 나무는 그보다 어린 300년 정도 되었다. 처음 심은 이후 다시 심은 것이다. 숲은 워낙 우거져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지난여름 더위를 피해 여기서 지냈다고 한다. 그들에게 숲은 천연 에이컨이자 피서지였다.
숲쟁이를 지나 1km 남짓 달리자 영광대교에 이른다. 대교 아래 바다가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는 것처럼 파도가 높다. 마치 바다는 성난 듯 보인다. 파도는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전속력으로 달려와서 모래미 해수욕장에 철퍼덕 주저앉는다. 모래미 해수욕장은 고운 백사장으로 유명하다.
모래미 해수욕장을 벗어나자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가 이어진다. 전망 좋은 곳에 너른 주차장이 있다. 여기에 차를 두고 걷기 시작한다. 칠산정과 노을전시장을 거쳐 대신보건진료소 앞에서 버스를 타고 되돌아올 예정이다. 백수해안 해당화길의 으뜸 구간을 걷는 셈이다. 이 구간은 백수해안 해당화길의 백미 구간이다. 걷다 서기를 반복하며 풍경 감상에 여념이 없다. 해안도로 아래에 나무 데크가 조성된 구간은 3.5km다. 이 구간을 일명 ‘노을 길’이라 부른다. 칠산정은 백수해안도로의 여러 전망대 중에서 으뜸이다. 탁 트인 시야와 바다에 떠 있는 돔배섬, 질주하는 차량의 행렬까지 완벽한 그림이다. 칠산정 아래에는 ‘건강 365계단’이라 불리는 나무 데크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산책로 주위로 나무가 울창하다. 바닷바람에 숲 내음이 더하니 이보다 상쾌할 수 있을까. 계단 주변에 나무가 울창해서 뙤약볕을 피할 수 있다. 산책로는 노을전시관까지 2.3km가량 이어진다. 노을전시관 주변에는 거무칙칙한 갯바위들이 해안을 따라 너울처럼 이어진다. 바다로 향하는 전망대 끝에 서본다. 북서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다는 낯을 가리는지 매우 거세게 반응한다. 파도는 하염없이 갯바위를 때리고 부딪힌 파도는 하얀 물거품을 내며 쉼 없이 부서진다. 망중한에 빠진 듯 한참을 바다를 바라본다. 거침없는 파도가 시름을 씻어주는 듯하다. 강하게 밀려왔다 쓸려나가는 파도 소리가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쩌렁쩌렁 울어댄다. 심한 바람을 피해 잠시 노을전시관에 몸을 들인다. 전시관에는 노을이 생기는 과학적 근거는 물론이고 문학과 사진을 통해서도 노을을 만나고 음악 속에 등장하는 노을도 노래로 만날 수 있다.
내친김에 해넘이까지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저녁 7시경.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태양이 붉은 장막을 부여잡은 채 아쉬워하며 바다에 입수한다. 사람들은 백수해안도로에서 동해를 연상한다. 거친 바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해넘이만큼은 이곳과 비교할 수 없다. 서해로 떨어지는 붉은 태양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이유는 해넘이를 보기 위해 꾸준히 걷고 달려온 시간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래에 대해 더 희망을 품어봐야겠다.
Travel tip
‘영광칠산타워’는 서해 비경과 낙조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111m에 높이에 있는 ‘바다전망대’에 오르면 광활하게 펼쳐진 칠산 앞바다와 주변 육지가 한눈에 들어와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줄 것 같다. 끝없이 펼쳐지는 서해 칠산바다 너머로 타오르는 노을은 코로나 블루에 지친 여행자들에게 적잖은 위로가 될 것이다.
내비게이션 정보
전남 영광군 백수읍 해안로 957 노을전시관
영광군청 관광관리팀 061-350-5600
글쓴이 임운석은 한때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이후 직장을 다니던 중 아내와 ‘평생 여행만 하자’고 약속한 뒤, 여행작가로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객원 사진가를 지냈으며, 포토에세이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일상에서 여행의 묘미를 찾는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작가가 선택한 최고의 여행지를 소개한 《내가 선택한 최고의 여행》 등 다수의 책을 썼다. 방송 활동도 왕성해 지난해부터 KBS 2 <굿모닝 대한민국 라이브>에 출연 중이다. 여행 인문학 강사로도 인기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