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사업을 하다가 새로운 분야에 진출해 기술을 닦아보고자 했던 백승준 씨는 의욕적으로 에어컨 설치업에 뛰어들었다. 매번 조심하며 일해도 수시로 달라지는 현장 상황에 위험 요소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은 일. 사고 이후 재활에 전념하며 직장복귀를 준비하는 백승준 씨의 든든한 조력자는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직장복귀지원팀이다.
정리. 정라희 사진. 강권신
제주에 찾아온 봄의 맛을 찾아서
사계절이 아름다운 섬 제주도지만, 그중에서도 빠르게 찾아온 봄을 느끼기에는 제주도 만한 곳이 없다.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 겨우내 추위에 떨었던 몸과 마음이 제주의 포근한 날씨에 사르르 풀렸다.
내륙에서는 동장군이 물러설 줄 모르는 시기지만 제주는 봄의 전령사가 마술을 부린 듯 봄바람 살랑살랑 불며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그리고 제주 바다의 봄 전령사가 있다.
‘멜’, 제주 멸치를 이르는 말이다. 매년 봄이 되면 서귀포 앞바다엔 은빛 ‘멜’의 춤사위가 펼쳐진다. 멸치는 난류성 회유성 군집성 어류로 봄, 남해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8월에 평안도, 함경도 해안에 이른 후, 다시 남하하기 시작해 겨울에 남해로 되돌아온다. 멸치 떼를 잡는 것도 회유 경로를 따라 지역별로 시기가 달라지는데, 남해안 일대는 3~4월, 중부 동해안은 5~7월, 북부 동해안은 9~10월에 멸치잡이가 가능하다. 그리고 서식 장소, 계절에 따라 멸치잡이 방식도 지역마다 다른 것이 특징이다.
남쪽 바닷가 사람들은 ‘봄 멸치 가을 전어’라고 했다. 특히 2월부터 4월까지 잡히는 제주 봄 멸치는 마른 멸치 상품 중 단연 특상품이다.
제주의 멸치 조업 방식인 챗배어업은 거제 등 다른 지역의 안강망어업(조류가 빠른 곳에 어구를 고정해 놓고, 멸치가 조류의 힘에 의해 강제로 자루에 밀려 들어가게 하는 방법)과 기선권현망어업(2척의 어망을 탑재한 망선이어구를 예인해서 자루그물 속에 갇힌 멸치를 잡는 방법)에 비해 멸치 외관 등 몸체의 손상이 거의 없어 최고 품질의 마른 멸치를 생산할 수 있다.
만선의 꿈을 품은 제주의 멸치배들
모든 생명이 튼튼해지는 해발 500m고지, 장수는 붉은 열매의 파라다이스다. 산간 지대의 높은 일교차로 탐스러운 열매들을 단단하고 당도가 높게 길러냈 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풍부한 산촌의 식재료를 가진 장수군의 대표 특산품은 사과와 오미자, 토마토, 한우, 약용작물, 표고버섯, 파프리카다. 모두 높은 고도의 기후로 식재료의 조직이 치밀하고 향과 맛이 진하다. 장수의 미식 여행을 시작하기 전 로컬푸드 마켓에 들려 사과 주스와 오미자 주스를 시원하게 마셔볼 것.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에너지가 샘솟는다.
“성산포에선 괴기 잡앙 먹엉사는 사람 아니래도 아르바이트 삼아 멜 잡는 배는 꼭 혼 번 타보랜허주 마씸. 제수 조으민 10만 원 벌 때도 있주마는 허탕 치는 날이 하우다게. 그래도 경험 삼아 혼 번 타보랜 헙니다.”
멸치를 잡는 양에 따라 몫을 나눠 갖기 때문에 많이 잡을수록 주머니도 두둑해진다고 했다. 바다 위 힘차게 파도를 가르며 뱃길을 이동하는 시간, 어부의 일터도 이때만큼은 꽤 낭만적으로 바뀐다. 찬바람에 몸을 녹이라며 건네주신 커피 한 잔. 커피 마니아들이 별다방 콩다방의 커피를 찾듯, 내가 좋아하는 최고의 커피는 바로 어부 바리스타가 탄 달곰한 선상 커피다.
선원들이 바쁘게 그물 손질을 시작했다. 제주 멸치는 일반 멸치에 비해 크기 때문에 그물에 구멍이 잘 난다고 했다. 이리저리 기워져 누더기 그물이 됐지만, 이 누더기 그물이 바로 돈 퍼주는 황금 손 아니던가. 어부의 바느질이 마치 복을 담는 복주머니 다루듯 정성 가득해 보였다.
서귀포항에서 출항한 지 한 시간 째. 멸치 떼가 모인 곳을 찾기 위해 어류탐지기와 선장의 수십 년 노하우가 어우러진 고도의 신경전이 펼쳐진다.
“제주 멜은 깜깜한 한밤중에야 볼 수 있지 마심. 밤중에 멜을 꿈쩍꿈쩍 놀라게 해서 물 위로 뛸 때 단번에 건지외다.”
‘쾅! 쾅! 쾅!’ 이때 쩌렁쩌렁 울리는 정체 모를 소리. 이러다 오던 봄도 도망가고, 멸치도 죄다 도망갈 판이다. 가판 위까지 느껴지는 지진 같은 진동. 그리고 귀가 먹먹할 정도로 쇳덩이가 부딪치는 소리. 이게 바로 선장님이 말한 멸치 놀라게 하기란 말인가? 나도 놀라 자빠질 뻔했다.
멸치배는 조업 중에 닻을 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배 앞머리에 80kg 무게의 닻을 놓고 멸치 떼가 보이면 사람이 들었다 놨다 하며 닻을 찧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한쪽에선 사다리꼴로 생긴 그물이 서서히 바닷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선 환한 백열전등으로 바다를 비추기 시작했다. 소리에 놀라 튀어 오른 멸치를 불빛으로 유인해 그물로 몰아넣는 것이다.
서‘챠~ 챠~ 챠~’ 마치 달궈진 기름 팬에 튄 물방울처럼 수십만 마리가 정신없이 튀어 오르더니 바다에 잠겨있는 그물 속으로 스스로 튀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고요하던 바다가 멸치 튀는 소리와 물보라로 요란해졌다. 배 위에서는 6명의 선원이 저마다 맡은 역할을 다 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올려! 잡어! 땡겨!”
바다 사나이들의 거친 말투와 모습에서 엄청난 포스가 느껴지는 순간이다. 큰 그물이 멸치 떼가 도망가지 못하게 들려지면 뜰채 역할을 하는 그물이 내려가 멸치를 퍼 담아 올렸다. 견인기의 힘으로 뜰채를 들어 올리면 멸치 그물은 거대한 원기둥으로 변한다. 그것을 세 명의 선원이 부여잡고 어창으로 힘껏 밀어주는데 그물을 이동시키기가 쉽지가 않아 보였다. 특히 멸치가 가득 들어차면 배로 힘이 들어 보였다. 그런데 힘든 내색보다 묵직한 그물에 감탄사가 연발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야 씨알 좋구나!”
멸치배를 가득 채운 봄 멜의 향연
촤라락. 은빛 멸치들이 쏟아져 내린다. 그물을 이동시키는 작업은 협동의 힘이 있어야 하고, 그물을 어창 입구에 잘 맞춰 멸치를 담는 작업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노련하게 해야 한다. 성질 급한 멸치는 팔딱팔딱 몇 초 만에 금방 죽어 버리기 때문에 재빨리 어창에 넣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고 보니 멸치배 선원들은 각자의 역할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닻을 찧고, 조명을 들고, 어창에 멸치를 쏟고, 정리하고 그물을 올릴 때는 힘을 합하고 다시 각자 맡은 자리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제주 봄 멸치는 크기가 무척 크다. 길이가 7~12cm 정도로 작은 꽁치처럼 보였다. 멸치가 크니 비늘도 컸다. 어느새 내가 입은 작업복은 물론, 얼굴 머리 전신이 온통 멸치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멸치 비늘이 이렇게 크고 많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멸치 떼를 쫓아 밤새 이어진 조업에 어창 가득 멸치가 찼다. 이쯤 되면 멸치 창고는 보물 창고나 다름이 없다. 만선이 되어 돌아오는 멸치배는 항구에 돌아올 쯤 전장에서 이긴 개선장군이 따로 없다.
제주 멸치배를 다시 탈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오지 못하더라도 밤공기 마시며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오는 멸치배를 열렬히 환영해 주고 싶은 맘이다. 멸치 한 줌 집어넣고 육수를 끓이다 보면, 가끔 제주 밤바다에서 튀어 오르던 그 날의 멸치 떼가 생각난다. 금방이라도 멀건 냄비에서 튀어오를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