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평소와 달리 움츠러들어야 하는 시절이지만, 계절은 아랑곳 않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움터가는 꽃망울과 한층 살랑살랑하게 흔들리는 나뭇잎이 그 징표다.
경주의 유적지를 밝히는 야경도 이 시기에는 한층 꿈결 같은 분위기를 드리우고,
보문단지에는 어느새 연분홍빛 구름이 몰려온 듯 벚꽃이 만개한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취향에 따라 가볼 수 있는 곳도 많아 눈요기로도 차고 넘치게 배불러지는 곳이다.
글 김그린 여행작가
보문관광단지에서 열리는 경주벚꽃축제는 이제 전국구 축제로 자리 잡았다. 안타깝게도 2020년 축제는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되었지만, 오랜 시간 관광지로서 명성을 쌓은 곳답게 여전히 독특한 매력이 있다. 대부분의 관광지들이 따로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지만 한 시간 가량의 보문호 산책이나 자전거 탐방은 비용을 내지 않고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코스다.
반나절 가량 이 일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경주문화엑스포공원을 추천한다. 엑스포 이후 이 일대를 그대로 공원화했는데, 경주를 한 눈에 둘러볼 수 있는 경주타워, 박대성 화백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솔거미술관이 주요 포인트다. 특히 솔거미술관은 빛을 아름답게 사용한 승효상 건축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데, 색채가 가득한 미술작품과 어우러져 인생샷을 남길만한 곳으로도 정평이 나있다.
신라와 연계된 다양한 전시를 볼 수 있는 것도 문화엑스포공원의 장점이다. 경주의 세계문화유산을 담은 ‘찬란한 빛의 신라’는 천년 고도 경주의 문화유산을 라이트 아트로 표현한 곳이다. 각 전시 영역의 빛의 윤무는 그 자체로 예술미를 자랑한다. 그 외 최초의 맨발전용 둘레길인 ‘신라를 담은 별’은 밤이 되면 길을 밝히는 불빛이 한층 아름답게 물든다.
동해 바다를 바라보는 석굴암 부처님의 인자한 미소와 불국을 지상으로 옮겼다는 불국사의 미려한 자태는 통일신라시대의 미를 집대성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이를 건축한 김대건의 불교적 윤회관이 곳곳에 스며든 길을 한발 한발 걸어가다 보면 또 다른 세계를 만나러 가는 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김대건은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우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그 구조 하나하나에도 정성이 듬뿍 묻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국사
불국사와 석굴암의 사이를 이어주는 우거진 숲길 역시 독특한 감흥이 생기기는 마찬가지다. 다소 경사도 있고 걸어가는 시간도 한시간 가량 걸리지만 토함산 산책로를 추천하는 이유는 숲길에서 듣게 되는 종소리와 고즈넉한 분위기 때문. 예전에는 이 산책로가 불국사와 석굴암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이제는 석굴암 근처까지 자동차가 갈 수 있는 주차장과 버스정류장이 생겼다.
그렇게 만나는 석굴암은 지금도 한국인이라면 가슴 아프게 여기게 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석굴암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외벽과 석굴 사이에 채워진 콘크리트가 결로와 이끼를 잔뜩 끼게 만들어버렸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출입으로 습도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다를 수 있는 곳은 본존불 앞에 쳐져 있는 유리벽까지 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자비로운 웃음은 불교미술사의 석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이유를 깨닫게 만든다.
보통 경주를 신라의 천년 고도로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말이 맞다. 그러나 동시에 경주는 조선시대 영남학파에 큰 영향을 미친 양반 문화의 도시이기도 하다. 조선 성리학의 태두이자 영남 남인의 대표격인 이언적의 본향이 경주이기도 하다. 이언적의 본관인 여주 이 씨와 그의 외가인 경주 손 씨가 모여 만든 집성촌인 양동마을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풍수지리와 유교를 기반으로 한 양반 집성촌의 구조는 지금도 남아있는데, 다른 곳처럼 외지인이 다수를 차지한다거나 집 모양만 그대로 살려놓은 것이 아니다. 지금도 전통 가옥에서 사람들이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엄연한 생활공간이다.
양동마을
옥산서원
안타깝게도 2017년 포항 지진으로 인해 무첨당과 서백당을 비롯한 많은 고택들이 기와가 탈락되거나 벽에 균열이 가는 등의 파손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동마을 특유의 전통적인 분위기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짧은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는 토종개, 동경이는 덤이다.
이언적의 흔적은 옥산서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최초로 성리학 저술을 남긴 대학자로서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는데, 선조 대에 신원되고 서원에 모셔지게 되었다. 이후 옥산서원은 지역 유림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영남의 남인을 대표하는 장소가 되었다. 앞에는 수업하는 교실을 두고 뒤편에는 성현을 모신 사당을 배치했는데 교실을 들어가기 전에 나오는 무변루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추사 김정희와 석봉 한호 등 조선을 대표하는 명필들의 글씨가 편액으로 걸려있는 것도 이 서원의 정통성을 가늠하게 한다.
호수와 어우러진
신라 왕실의 멋과 과학,
첨성대와 월지
경주 시내로 들어와 돌아다니다 보면 첨성대와 월지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이 일대는 노을지기 시작한 저녁때에 둘러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낮에도 볼만하지만, 밤에는 조명이 켜지면서 한층 서정적인 풍경이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현존하고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자 별다른 재건이나 복원 없이 원형을 유지한 첨성대에도 황금빛 조명이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남산성 길에서 동궁과 월지까지 은은한 불빛이 밤 산책의 흥을 돋워준다.
첨성대
월지
신라시대 왕위계승자가 기거했던 동궁과 인공호수인 월지도 밤의 탐방객들을 환영하듯 밤 10시까지 개장한다. 특히 월지는 신라시대의 조경건축을 가늠 할 수 있는 유물 중 하나다. 서쪽과 동쪽의 높이를 다르게 하고 곡선과 직선을 섞은 모양으로 둘레를 만들어 그 어느 곳에서도 호수 전체가 보이지 않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이 곳의 누각들은 왕실에서 연희를 베풀 때 쓰였는데 지금으로 따지자면 조선시대의 경회루와도 같은 위치인 셈이다. 열두 봉우리의 산을 만들고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그 옛날의 모습과는 비교되지 않지만, 호수에 아롱지는 야경의 모습만으로도 이 곳을 확인할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