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익숙한 게 있다.
출퇴근하는 길이 그렇고 일상을 반복하는 공간이 그렇다.
문득 대로변 가로수를 올려다본다. 언제 이렇게 푸르고 울창해졌을까.
우리가 마스크를 끼고 세상과 거리 두기를 하는 사이 가로수는 짙푸른 생명을 노래하고 있었다.
느끼지 못해도 계절은 흐르고 봐주지 않아도 꽃은 피는 게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푸른 나무가 말하는 것 같다. ‘인생은 먹고 자고 마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인생에서 부족한 것을 채우러 여행을 떠난다.
강원도 강릉으로.
글. 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가장 강릉다운 곳에서 한나절
인생은 항상 부족한 것 투성이다. 그렇다고 고갈되거나 턱없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2%
부족하다.
그런데 그 2%가 사람을 우울하게 하고, 병들게 하며, 끝없이 자존감을 낮추기도 한다. 부족한 2%를 채우는, 이것이 누구에게나 힐링이 필요한 이유다. 자연은
힐링이 필요할 때마다 챙겨 먹는 상비약과 같다. 자연은 소리 없이, 변함없이 마음과 생각을 치유해준다. 그 맛을 알기에 지금 강릉 경포대해변을 거닌다.
경포대해변은 부산 해운대해변과 더불어 우리나라 해변의 양대 산맥과 같아서 여름철 젊음의 열기로 후끈하다. 탁 트인 동해를 가슴에 한껏 담거나, 새하얀 백사장과
솔숲을 따라 산책을 즐겨도 좋다. 또 강릉 시내와 가까운 덕분에 강릉을 찾으면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이곳을 들린다. 물론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과 한옥의
기품이 옹골찬 선교장, 비운의 예술가 허난설헌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것도 한몫한다. 강릉은 커피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시원한 창파를 바라보며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여유도
챙겨볼 일이다.
여유로운 발걸음은 경포호 산책로를 따라 경포대로 향한다. 1km 남짓한 거리라 부담스럽지 않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에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경포대는 고려 말 안축(1282~1348)의 ‘관동별곡’에 처음 선보인다. 이후 조선 가사 문학을
대표하는 송강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에도 등장하면서 요즘 핫플에 등극한다. 경포대 누각 안에 수많은 편액이 걸린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다. 누마루에 오르면
경포호가 한눈에 들어와 가슴 깊은 곳까지 탁 트인다. 경포호 수면을 휘감고 불어오는 바람은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다.
경포호를 감싸듯 걸어가면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생가터에 닿는다. 복원된 생가는 울창한 솔숲에 자리한다. 80년 이상된
고목과 어우러진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의 운치가 깊고 아늑하며 고요하다. 경포대해변에도 솔숲길이 있지만, 여름철에는 사람이 많아 아쉬웠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솔숲의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나뭇가지를 비집고 내리쬐는 햇빛 한 줌이 예쁘고, 바람에 흔들리는 솔잎의 춤과 산새의 흥겨운 노래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무심코
지나치기엔 그 향과 소리가 어찌나 남다른지 걸음이 한없이 느려진다. 이게 힐링이다. 솔숲에서 유유자적했다면 허난설헌 기념관에 들러 보자.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
문인이지만 비운의 삶을 살다 간 그녀의 문학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솔내음을 물소리에 실어 마음속에 담다
강릉시가 내세우는 슬로건 ‘솔향 강릉’에서 알 수 있듯, 강릉에는 소나무가 유난히 많다. 주로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림 목적으로 조성한 까닭에 동해를 마주한 해안가에 많이
분포한다. 하지만 강릉 내륙에도 소나무가 많다. 강릉솔향수목원도 그중 한 곳이다.
2013년 10월에 문을 연 강릉솔향수목원은 강릉시 구정면의 칠봉산(360.8m)과 매봉산(820.7m) 기슭에 자리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
‘용소골’이라 부른다. 높이가 서로 다른 두 산이 만나는 골짜기인 만큼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숲 본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수목원의 자랑거리는 7만 9,000m²(약
24만 평) 부지에 빽빽하게 자란 금강소나무다. 금강소나무는 강원도와 경상북도 지역의 산비탈과 능선에 주로 자생한다. 일반 소나무와 비교해 줄기가 굽지 않고 곧게 자라며
마디가 길어 위엄이 있어 보인다. 그 덕분에 정원수와 건축재로 많이 사용된다.
앞서 걸었던 경포대해변에서 허난설헌 생가터까지 구간보다 강릉솔향수목원은 아직 덜 알려졌다.
유명 관광지나 걷기 좋은 길과 비교해 붐비지 않아 호젓하다. 특히 여름철에는 울창한 숲속 그늘과 시원한 냇물이 있어 특별한 피서지로 손꼽힌다. 수목원에는 모두 23개의
테마가 있는데 계절의 변화를 보고 즐길 수 있도록 비비추원, 수국원, 암석원, 약용식물원, 원추리원 등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중 자생 수종인 금강소나무가 울창한 ‘천년 숨결
치유의 길’이 수목원을 대표하는 산책 코스다.
수목원 입구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른다. 이내 내리막길이 잇대고 작은 냇가가 반긴다. 우선 숲길을 걷고 싶은 마음에 시원한 냇가의 유혹을 뿌리치고 숲속에 발을
들인다. 선택한 코스는 ‘천년 숨결 치유의 길’을 거쳐 ‘하늘정원’으로 오르는 숲길이다. 수목원에서 백미로 손꼽히는 코스다. 얼마 가지 않아 숲체험 학습원에 이른다. 유치원
꼬마들을 위한 자연학습체험장으로 활용 중이다. 이후부터는 나무데크길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걷기에 편해 걸음이 불편한 사람도 보호자와 함께라면 숲을 체험할 수 있다. 테크길
양옆에는 금강소나무가 빽빽하게 심겨 서로 키 자랑을 하듯 하늘로 곧게 뻗었다. 금강소나무의 곧고 굵은 기둥에서 붉은빛이 은은하게 감돌아 소나무의 제왕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포스가 느껴진다. 또 하늘로 올라갈수록 녹음이 짙고 무성해 넉넉한 품을 자랑한다. 청록빛 잎사귀에서 내뿜는 짙은 솔향이 산책길을 가득 채운다. 수목원을 조성할 때 한 그루의
금강소나무도 인위적으로 심거나 옮겨서 자연의 모습을 해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산책길은 소나무 을 가로지르는 법이 없이 에둘러 자라있다. 설령 길 앞에 나무가 있어도
베거나 옮기지 않고 길이 나무를 품어버린다. 그 덕분에 데크길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과 하나가 되며 그 길을 걷는 사람도 자연이 된다. 자연이 선사하는 힐링을 맛보며 걷다
보면 이내 솔향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에 오르자 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던 금강소나무의 머리끝을 볼 수 있다. 아귀다툼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마음 아파하는 이유는 내가
머물고 선 곳이 이 같은 정상의 위치가 아닌, 다툼 속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 발짝 높은 곳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니 마음 아파했던 나를 위로할 만큼 마음이 넓어진다.
전망대에서 내려오자 작은 시내가 마중한다. 힘들게 걸어온 발에게 포상이라도 하듯 탁족을 즐긴다. 맑디맑은 시냇물에 발을 담그자 여행의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몸은 다시
재충전 된다. 가벼워진 몸은 이내 하늘정원에 닿는다. 해발 261m에 자리한 하늘정원은 수목원에서 전망이 가장 좋다. 화창한 날엔 동해까지 아득하게 보인다고 한다.
하늘정원에서 내려가는 길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이전 길이 울창한 나무가 키 자랑을 하듯 경쟁의 연속이었다면 내려가는 길은 아기자기한 정원과 예쁜 꽃길이 이어진다. 그래서
마음에 부담도 없고 힘들지도 않다.
2% 부족한 것을 바다와 솔숲에서 채웠던 강릉 여행. 일상보다 느린 걸음으로 마주한 강릉의 풍경들이 마음에 작은 위로를 건넨다. “자연의 절정기가 여름이라면, 네 삶의
절정은 지금이라고. 그러니 여태껏 묵묵히 걸어온 것처럼 앞으로도 걸어가”라고.
여행 정보
한여름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시원한 커피 한 잔! 생각만으로도 낭만적이다. 강릉에는 바다를 마주하고 커피를 즐길 곳이 많다. 가장 핫한 곳은 역시 안목해변이다. 30여 곳에 이르는 카페가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와 맛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내비게이션 정보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수목원길 156 강릉솔향수목원
문의
강릉솔향수목원 033-660-2322
경포관광안내센터033-640-4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