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따라 맛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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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 사이로 들어오는 푸른 섬의 기억
제주 성산일출봉
제주도의 겨울은 새롭다.
육지사람에게는 퍽 따듯해보이는 날씨가 새롭고, 그 날씨에 바람 하나만 얹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한겨울이 되어버리는 재빠름이 새롭다. 푹푹 발이 빠질 것처럼 내리지만,
잠시 햇빛만 비춰주면 어느새 아스라이 사라져버리는 눈발이며, 저 멀리 귤껍질을 말리느라
푸른 바닷가와 대조되게 널찍하니 깔린 귤껍질의 색채도 새롭다.
한창 휴가철이었을 때의 제주도랑 요모조모 비교해봐도 확실히 색다른 맛이 있다.

글. 김그린

일출제로 한 해의 더께를 툭툭 털어내다
해안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다 보면 어느새 성산일출봉이 나온다. 아마 제주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을 동원하는 오름일 터이지만, 독특한 산세와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이 곳을 올라갈 이유를 차고 넘치게 만들어준다. 새해 해돋이를 보겠노라 계획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이 곳에서 일출을 바라보는 것이 제주도 경치 중에서도 열손가락에 뽑힌다는 말이 있다니 귀가 솔깃해지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다. 그런 마음에 도전심을 얹어주기 위해서일까, 성산일출봉 일원에서 이루어지는 성산일출제 때에는 선착순 1,500명에게만 일출봉 정상까지 등반을 할 수 있도록 제한을 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성산일출제를 즐긴다는 반증이리라. 새벽 세시 반부터 기다려 받아가는 성산일출봉의 등반권은 어떤 의미로는 치열하다. 아직 어두운 새벽이라 누가 새벽에 와서 받아갈까 싶기도 했지만, 밤을 새며 새해를 맞는다는 성산일출제의 위력을 너무 과소평가한게다. 주변 가게들도 불을 환히 켜놓아 거기서 추위를 피하는 사람도 있고, 근방에 차를 가지고 온 사람은 차에서 쪽잠을 자면서 등반을 기다리기도 한다. 아까까지 덩실덩실 놀았던 달집의 남은 불씨로 추위를 견디며 등반 시작 시간인 오전 여섯시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불길이 잦아들어 미세하게 타닥거리다가, 쉬익거리다가, 잉걸불이 사위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작년의 더께도 스륵스륵 타올라 하얀 재가 되어버리는 느낌이다.

그렇게 자는둥 마는둥 하다가 여섯시에 일어나 일출봉을 오르기 시작하면 어둠속에 파묻힌 성산읍의 야경이 색색으로 빛난다.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고 가장 춥다지만, 다소 가파른 경사가 있는 일출봉을 올라가는데도 어째 땀이 나는 기색이 없다. 나무데크가 깔려있어 발딛기가 까다로운 편은 아니지만, 어둠 속에 가는 길이기도 하고, 그래도 경사가 있어 속도도 늦추다 보니 이렁저렁 40분이 넘게 걸렸다. 일출까지는 아직도 한시간이 남은 상황이지만 이래저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일출기원제를 지내며 기대에 찬 모습을 보는 재미로 시간을 보낼 법 하다. 여기에 붉은빛 여명이 제 오고 있노라고 하늘을 한뼘씩 물들이니 이 또한 눈길이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구름이 많이 끼었다면 20분이고 30분이고 해가 지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해는 뜬다는 그 사실이 해돋이를 더욱 희망차게 만든다. 다시 하산로를 쭉 두른 나무 데크를 따라 행사장으로 돌아오면 한살 더 먹었다고 떡국을 조금씩 나눠준다. 푹 끓인 떡국으로 잠시나마 얼었던 속을 달랬다면 이제는 슬슬 자리를 떠야 할 때다.
가까운듯 먼듯, 다른 곳에서 바라보는 성산일출봉

섭지코지로 출발하기 전, 잠시 들린 곳은 광치기 해변이다. 간조일 때는 물이 쫙 빠진 바닥에 붙어 사는 이끼가 푸릇푸릇하게 초록색을 드러내 아름답고, 일출이나 일몰일 때는 붉고도 푸른 하늘이 어룽져 아름다운 곳이다. 물때도 해시간도 못맞췄지만, 그래도 이 곳을 굳이 들릴 이유가 있었다. 성산일출봉에서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이 곳이 성산일출봉의 모양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는 마지막 장소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섭지코지가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을 것이나, 섭지코지에 건물이 하나 둘 올라서며 일출봉의 풍광은 건물의 이용객이 아니면 다소 가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지코지를 꿋꿋이 찾게 되는 것은, 건물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경치가 흥미로운 구석이 있어서다. 예를 들면, 안도 타다오가 지은 지니어스 로사이, 현재는 유민미술관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은 공간이 대표적이다.

건물 전체에서 느껴지는 시멘트와 현무암의 묘한 조화라던가. 제주에 많다는 3가지를 형상화한 각각의 정원들이라던가. 한뼘이나 될까 싶게 뚫은 바람창 사이로 성산일출봉이 한걸음 한걸음 나에게 다가오는 풍경이라던가. 아르누보 양식에 흥미있는 사람이라면 이 미술관의 컬렉션도 발길을 잡아당길 법하다.

겨울 제주는 확실히 제주도에 많다는 세가지 중 바람만은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이 많이 빠진 제주 곳곳이 어떤 식으로 쨍하게 빛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제주도 곳곳을 다니며 바람소리, 파도소리를 머리 속에 담아오는 것은, 잠시 잠깐 힘들 때 제주도의 푸르름을 언제고 재생할 수 있는 마음 속 만화경을 장만해오는 것이리라.
제주의 맛


[해장국]
일출봉 정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출기원제와 해돋이를 모두 보았다면 싸늘한 칼바람에 시달린 속을 달래러 아침식사를 먹어야 할 때. 이럴 때 반가운 것은 아무래도 뜨끈하고 시원한 국물이 우러나온 국밥류다. 제주도에서는 해물을 먹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긴 힘들지만, 진하게 끓인 국물과 푸짐한 건더기는 씹고 씹을수록 감칠맛이 더 감돈다.
[고등어회]
겨울철에 뭔가 제주스러운 것을 먹어보고 싶을 때, 12월이라면 대방어, 그 이후라면 고등어회를 추천한다. 요새야 양식 고등어가 많으니 계절이 무에 상관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겨울을 견디기 위해 살을 잔뜩 찌운 고등어는 회로 먹어도 달콤하고 기름진 풍미가 절절 흐른다. 여기에 회 뜨고 남은 뼈를 지리로 절절 끓여주는데 이것도 별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