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부는 바람은 유난히 따스하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새벽 온도가 영하였기 때문이다.
봄은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찬란하게 물들인다.
초록 줄기를 따라 붉은색, 노란색, 하얀색이 꽃을 피우니 햇살 비추는 곳마다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다. 충청남도 금산(錦山)은 비단 같은 산이 에두른 곳으로 봄에 여행하기 제격이다.
글. 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고혹적 매력 뽐내는 선홍빛 홍도화
소리 없는 변화가 있다. 사랑의 마음과 따사로운 봄날 꽃망울을 터트리는 꽃이 그렇다. 봄은 나긋한 바람과 소리를 머금고 부풀어 오른다. 봄볕이 잘 드는 충청남도 금산군은 북쪽에 대전광역시, 서쪽에 논산시, 남쪽에 전주시와 무주군에 둘러싸인 내륙이다. 금산이라는 지명보다 지역 특산품인 ‘금산인삼’으로 더 잘 알려진 만큼 금산에는 도로변 곳곳에 인삼밭이 즐비하다. 금산군 남일면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이곳은 이맘때 울긋불긋한 꽃이 만개해 천상 화원을 보는 듯하다.
홍도화는 꽃잎 색이 붉어 홍도화라 부른다. 복숭아나무에 피는 꽃이라 하여 복사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꽃은 4~5월에 잎보다 먼저 핀다. 주로 겹꽃으로 펴 가지를 붉게 뒤덮을 만큼 화려하다. 복사꽃은 대부분 백도화나 삼색도화가 일반적이다. 홍도화 특히 겹꽃으로 피는 홍도화는 매우 희귀한 품종으로 복사꽃의 약 10% 정도뿐이라고 한다.
홍도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의 형상이 소반 위에 얹어놓은 붉은 복숭아를 뜻하는 홍도낙반형(紅
桃落盤形)의 명당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마을을 500m 남짓한 봉우리들이 에워싸 홍도의 모습을 닮았다. 마을 입구 표지석에 ‘도원(桃原)’을 음각해 놓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마을 입구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지나면 팔각정자가 있다. 작은 개천을 따라 집들이 어깨를 맞댄 모습이 평온하다. 담벼락에는 홍도화를 주제로 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붉은색 꽃 그림이 칙칙한 담장을 화사하게 바꾸어 놓았다. 마을에는 인삼을 재배하는 검은 차광막을 씌워놓은 밭이 많다. 밭두렁에 내려서서 차광막 내부를 들여다보면 초록색 물결이 넘실거린다. 새순에서 쌉싸름한 인삼 향이 느껴진다.
홍도마을엔 약 7,500그루 이상의 홍도화 나무가 4.2km 도로에 3,200그루, 홍도화 동산에 4,300그루가 심겨있다. 홍도화 동산을 올려다보면 야트막한 산에 횃불을 피운 듯 붉은 꽃이 장관이다. 반대로 홍도화 동산에서 도로를 내려다보면 개선장군을 영접하는 꽃길처럼 화려하다. 겹꽃으로 피는 홍도화는 거무칙칙한 나무에 마치 홍등을 단 것처럼 농염하다. 거부할 수 없는 관능적 매력과 아름다움으로 남성을 유혹하는 팜므파탈의 기운이 느껴진다. 우리 선조들은 복숭아나무를 집안에 심길 꺼렸다. 집안에 봉숭아꽃이 피면 부녀자의 치마폭 안에 봄바람이 분다고 해서다. 복숭아꽃의 화려한 색감이 화근이리라. 심지어 홍만선(1643~1715)은 저서 <산림경제>에 ‘우물가에 복숭아나무를 심으면 좋지 않다’라고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홍도화에서 화장을 짙게 한 여성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꽃말은 ‘사랑의 노예’ 혹은 ‘유혹’이다.
새벽녘 운무처럼 몽환적인 산벚꽃
홍도마을에서 옥천군 방향으로 30여 분을 달리면 금산군 군북면에 닿는다. 여기서 군북면 주민자치센터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면 산꽃로가 이어진다. 이후 산덕입구 정류장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임도가 놓였다. 임도를 따라 달리면 보곡산골마을에 이른다. 그런데 이 마을 이름은 행정구역상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다. 보곡산골은 보광리, 상곡리, 신안리 세 마을을 합해 지은 이름이다. 보곡산골은 국내 최대의 산벚나무 자생지 중 하나다. 서대산과 천태산 기슭이어서 평지보다 기온이 낮은 탓에 꽃이 늦게 핀다. 더군다나 요즘 같은 언택트 여행에 관심이 쏠리는 시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라 하겠다.
산벚꽃이 만개한 꽃길을 차를 타고 달린다면 몹쓸 일이다. 산벚나무가 가로수처럼 줄지어 서 있으니 산벚꽃을 벗 삼아 걷어볼 일이다. 걷기에 나선 사람들은 대부분 ‘보이네요 정자’로 가는 산책길 입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길은 차량이 함께 달리는 임도지만, 비포장인 데다가 굴곡이 심해 속도를 낼 수 없다. 이 임도를 따라 산을 한 바퀴 돌아 신안2리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구간을 ‘자진뱅이 둘레길’이라 부른다. 총길이는 약 7.5km 남짓이다. 소요 시간은 3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임도에 들면 인적이 드문 것을 실감한다. 산벚나무는 4월 중순부터 말까지 꽃을 볼 수 있다. 도시보다 열흘에서 보름 정도 늦은 편이다. 벚나무는 꽃이 피고 지면, 잎이 돋는다. 그러나 산벚나무는 꽃과 잎이 함께 핀다. 그래서 산벚꽃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제 막 개화를 시작한 모습을 보고 절정이 지났다며 낙담한다. 벚꽃은 가까이서 보는 게 제맛이라면, 산벚꽃은 산과 함께 봐야 한다. 그 모습이 마치 새벽녘 운무처럼 몽환적이다.
임도 주변에는 산벚나무만 있는 게 아니다. 길을 걷다 보면 삼각형 모양의 소나무 한 그루를 마주한다. 자전리 소나무라라 불리는 꽤 유명한 나무다. 300년 이상 된 이 소나무는 원래 암수 두 그루가 나란히 자랐는데 수나무는 죽고, 암나무만 남았다. 조팝, 이팝, 개나리, 철쭉이 길목마다 산허리마다 피어 있다. 어린 산벚나무의 연초록 이파리와 꽃잎이 여러 꽃과 어우러져 봄날의 꽃 향연을 펼친다.
봄볕이 정수리를 뜨겁게 달굴 무렵 그늘을 찾는다. 그때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처럼 ‘봄 처녀 정자’가 나온다. 다시 힘을 내어 시나브로 오르다 보면 걸어온 만큼 걸어온 길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아주 간간이 산벚꽃을 쫓아 앞서 걷는 사람이 있을 뿐, 산은 낮잠에 빠진 듯 고요하다. 그 풍경을 한 아름 품을 수 있는 곳에 ‘보이네요 정자’가 있다. 정자가 보이면 얼추 자진뱅이 둘레길이 끝나간다. 정자 이름처럼 정자에 올라서면 산허리를 휘감는 임도가 보이고, 듬성듬성 화사하게 만개한 산벚꽃이 보인다. 금산은 두 가지 색을 가졌다. 치명적이리만큼 고혹적인 홍도화의 선홍빛과 봄날의 신부 같은 수수한 산벚꽃의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온 나라가 뒤숭숭한 요즘, 정작 봄은 왔지만,
꿈꾸던 그 봄날이 아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느 봄날이 이처럼 적요했을까. 호젓하게 나만의 봄을 누렸다는 만족감에 호사스러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