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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섭 근로복지공단 초대 이사장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1993년 근로복지공사 사장으로 취임해, 1998년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으로 퇴임한 후 오랜 기간 마포구청장으로 지역을 보살피며 지냈습니다. 퇴임 후에는 평생 그래왔듯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제가 해야 할 몫을 고민하는 시간도 가졌지요. 민선 3기 구청장에 취임하던 당시만 해도, 마포구에서 태어난 신생아 수는 4,000명가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통계를 살펴보면 2,000명 내외로 줄어들었습니다.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줄어든 셈입니다. 태어나는 아이들이 줄어들면 노동력이 감소하고 국가경쟁력은 쇠퇴합니다. 이미 태어난 아이들을 얼마나 잘 키우느냐가 중요하지요.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계층 이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 문제 개선이 시급합니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 미래를 향한 투자입니다. 제가 현재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마포인재육성장학재단은 마포의 청소년 누구나 부모의 경제력에 상관없이 배움의 기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공평한 출발을 돕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마포구가 운영하던 80억 원의 마포 장학기금을 모태로 2014년 1월 출범해, 현재까지 1,700여 명이 넘는 학생이 걱정 없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스토리텔러자격증을 취득한 후 어린이집을 다니며 구연동화를 들려주는 일이 소소한 즐거움이자 보람이었는데요. 코로나19로 한동안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좋아져 다시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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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사 사장으로 취임하던 시기의 이야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취임 당시 근로복지공사 규모는 자본금 2,000억 원, 산재병원을 비롯한 전국 12개 기관 산하기관과 2,000여 임직원이 근무하는 근로자 복지 전담기관이었습니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성장 가능성이 높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복지정책 보다는 도로나 항만, 공항, 건설 등등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주력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조직 분위기 쇄신과 임직원의 사기 진작을 위해 가장 먼저 임직원 임금 인상을 추진했습니다. 뒤이어 중소기업근로자진흥법안추진에 박차를 가하며 실질적인 투자 재원 마련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법안은 취임 첫 해 통과되어, 이를 토대로 복권 발행 사업을 추진하고, 1994년부터 10년 동안 3,060억 원의 근로복지 진흥기금을 조성했습니다. 근로자문화예술제를 비롯해 산재 근로자 자 녀 장학사업과 근로자 생활정착금, 대부사업, 저소득 여성근로자를 임대아파트 운영 등을 본격적으로 운영했습니다. 그렇게 2년을 보낸 후 1995년 5월, 고용노동부 소관이었던 산재보험 업무를 새로이 발족한 근로복지공단에서 수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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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단에 공사가 통합되며 많은 변화가 찾아왔으리라 생각됩니다.

근로자 복지증진 전담 기관은 노동법을 공부하던 시절부터 제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기존의 산재의료사업과 근로자 복지사업 그리고 산재보험 사업이 서로 연결되어 삼각 구도를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는 본사였던 지금의 서울남부지사에는 여전히 취임 당시 새겼던 문구가 남아있습니다. '이곳은 오직 사랑과 봉사의 일터입니다'. 임직원들의 정신을 바탕으로 근로자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자는 게 당시의 경영 목표였습니다. 산재보험제도가 도입된 이래 30년간 수작업에 의존해 왔던 보험 관련 업무를 전면 전산화했습니다. 산재 보상과 요양, 재활 지원사업은 물론 문화 시설 설치와 중소기업 근로자 자녀 장학사업, 근로자 생활안정자금 융자사업, 근로자 휴양 콘도사업 등이 차근차근 마련되었습니다.

조직 통합과 IMF까지, 조직문화 운영에도 어려움이 있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확실한 보상과 솔선수범은 지금까지도 확고하게 지키고 있는 저의 원칙입니다. 취임과 동시에 임금 인상을 위해 노력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당시 우리 공단 직원들이 근로자들의 근로 환경을 직접 체험하고, 공단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매년 2회 산업현장 체험을 실시했습니다. 직원들이 다양한 노동을 경험하고 임금을 받음으로써 노동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임직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셨습니다. 당시 저는 안산에 있는 고속도로 방음벽 제조업체에서 일하고 임금을 받아왔지요. 그렇게 모은 임금 7,000여 만원으로 통일 후 묘향산에 근로자를 위한 휴양지를 건립하자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 농촌 일손돕기 등, 불우이웃돕기 성금 모금, 진폐 근로자 가족 돕기 등 함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활동에 모든 조직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습니다. 지금보다는 조직의 규모가 더 작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함께 지리산으로 소통 캠프를 가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요. 모든 순간이 어려움보다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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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단 27주년을 맞아 전임이사장으로서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했던 시기는 근로복지공단 재직 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확신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홀가분하게 일했고, 주어진 시간을 황금처럼 여기며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조직 통합을 거쳐 IMF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한 세월을 함께해준 임직원들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일이 많습니다. 함께 일한 임직원의 희생과 사랑에 감사를 전합니다. 지금은 공단을 떠났지만, 여전히 근로복지공단의 성과를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임직원의 가슴속에 사랑과 봉사정신이 담겨 있음을 느낍니다. 삶이 고통스러울 때, 이를 들어줄 단 한 사람만 있다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공단이 지금처럼 어려움에 빠진 근로자의 마지막 보루가 되길 바랍니다. 저 역시 노동복지허브로 나아가는 공단의 미래를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