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천동문화마을은 부산항이 내려다 보인다
힘든 시기를 함께한 산동네
부산의 원도심 마을은 대부분 산비탈에 자리한다. 산지가 많고 평지가 좁은 부산의 지리 지형적 특성이다. 이런 산동네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인이 해안지대를 매립한 후 토지를 독차지하며 생겨났다. 해안가 평지에서 밀려난 원주민과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외지인은 자연스럽게 산비탈에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부산에 유난히 산동네가 많은 이유인데, 당시에는 먹고 살기 어려울 때라 요즘처럼 구획정리나 택지개발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산비탈을 따라 산동네를 연결하는 산복도로도 이때 생겨났다.
감천문화마을은 부산의 대표적인 산동네다. 이 마을은 원래 태극도 신자촌으로 조성됐다. 태극도는 일제강점기(1918년)에 조철제가 증산사상에 기초하여 세운 신흥종교다. 해방 이후 1955년 부산 보수동에서 감천동으로 본부를 이전했는데, 이때 신자 4,000여 명이 함께 이주해 마을이 형성됐다. 그 당시 지어진 판잣집만 1,000여 가구에 이른다고 한다. 설상가상, 한국전쟁 피란민까지 합세했다. 그들은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있으면 판자를 주워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은 판잣집은 계단식 논처럼 차곡차곡 아래에서부터 산꼭대기까지 이어졌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외곽에 신도시 개발이 잇달았다. 마을 전체가 슬럼화될 조짐이 보였다. 더구나 지은 지 오래된 가옥은 남루한 옷을 걸친 듯 쇠락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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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과 마을이 하나처럼 보이는 하나되기포토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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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조형물
계단처럼 이어진 감천동벽화마을
감천문화예술마을로 거듭나
감천동에 도시재생이라는 구원의 손길이 뻗친 것은 2009년 마을미술 프로젝트 '꿈꾸는 부산 마추픽추'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마을 곳곳에 '꿈꾸는 물고기'. '무지개가 피어나는 마을' 등 10개 작품을 선보였다.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허름한 골목에 생기가 돌았다. 마을 분위기가 일순간에 바뀐 것이다. 그런데 미술 작품 몇 점 설치했다고 이렇게 바뀔 수가 있었을까? 아니다. 애당초 감천동은 '예술적 통일성'을 갖고 있었다. 1957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도시계획을 추진하면서 세운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바로 '모든 길은 통해야 한다'와 '뒷집의 조망권을 막지 말자'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애칭인 '한국의 마추픽추' 다운 면모를 마을이 조성될 때부터 갖고 있었던 셈이다. 2012년엔 '골목을 누비는 물고기', '어린 왕자와 사막여우' 등 10개 작품이 '마추픽추 골목길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이때는 빈집 5곳을 선정해 창작·전시공간을 추가로 만들었다. 또 골목 곳곳에 벽화와 예술 작품을 설치해 마을 전체를 하나의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2016년에는 '감천 아랫마을 내려가기·마을 사람 그리고 이야기'라는 주제로 '감천 황토소금 상회', '행복을 담는 장바구니' 등 12개 작품이 새롭게 선보였다.
어린왕자는 감천문화마을을 대표하는 포토존이다.
감천문화마을 콕 집어 여행하기
감천문화마을의 집은 특징이 있다. 지붕과 벽을 빨강, 파랑, 초록색 등으로 알록달록 칠한 것이다.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는 감천 고갯마루에 있는 버스정류장 뒤편 '하나되기' 포토존이다. 감정초등학교 근처에 있다. 이 전망대에 서면 이색적인 마을의 풍경이 동화마을처럼 펼쳐진다. '한국의 산토리니'라 불릴만한 정경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사진가는 이 풍경을 사진에 담으려 고갯마루가 닳도록 오르내린다.
마을 여행의 출발지는 새마을금고 분소가 있는 '문화마을 입구'. 공중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여행자는 대부분 포토존을 따라 이동한다. 첫 번째가 '사람과 새' 작품이다. 입구를 지나 건물 옥상에 시선을 두고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다. 새와 사람 조형물이 골목을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짙은 원색의 색감이 마을 지붕과 어우러져 조화롭다. 건물 외벽에 골목의 풍경을 거울처럼 또렷하게 그려놓은 벽화도 인상적이다. 작품 제목은 '마주 보다'. '작은 박물관' 내부도 챙겨보자. 주민들에게 기증받은 추억 가득한 생활용품과 옛날 판잣집 재현 코너, 마을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 옆에는 '하늘마루'라 불리는 안내소 겸 전망대가 있다. 옥상에 오르면 용두산을 포함한 부산항, 감천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물고기들의 이동을 표현한 '골목을 누비는 물고기' 작품도 인상적이다. 작품 규모가 꽤 커서 벽면 전체를 가득 채운다. 골목을 오르면 '북카페-흔적'이라는 작품이 보인다. 하얀 건물에 빨간 손잡이를 달아 놓아 마치 건물이 거대한 컵처럼 보인다.
마을 태생의 이야기를 담은 곳도 있다. '평화의 집-그릇의 방·달의 방'이다. 빈집에 꾸민 작은 갤러리인데 한국전쟁으로 인해 조성된 마을의 역사를 작품으로 표현했다. 당산나무를 비켜서 내려가면 주민참여 작품인 '문화마당' 앞에 멈춘다. 벽에 물고기 모양의 작품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사하구 종합사회복지관 어르신들이 직접 제작에 참여해 더 의미가 있다. 마을 안 골목길은 실핏줄처럼 이어진다. 막힘 없이 항상 열린 골목이어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더군다나 물고기 모양의 안내판이 벽면마다 붙어있어 가고자 하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골목은 계단과 연결된다. 189계단이 가장 길고, 다음은 '별 보러 가는 계단'이라 불리는 148계단이다. 두 계단 모두 감내어울터를 지난다. 감내어울터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옛 목욕탕 건물을 고친 커뮤니티센터다. 1층 입구에 들어서면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 조형물이 꾸벅꾸벅 졸고 있고, 실내에는 목욕하는 동네 할아버지 조형물이 '청산~'을 읊으며 시름을 달랜다.
계단식으로 조성된 감천문화마을
이색마을이라 부르기엔 가슴 아픈 곳
감천문화마을에서 약 400m 떨어진 곳에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 있다. 이곳 역시 감천문화마을처럼 시대의 아픔 위에 지어진 마을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왜 이곳이 비석문화마을인지 알 수 없다. 그냥 좁은 골목길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는 정도만 느껴질 뿐. 이 마을의 특징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가옥에 사용된 돌들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 돌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무덤 비석과 상석으로 사용하던 돌이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하자 일본인이 부산에 들어오면서 아미동에 공동묘지와 화장터를 만들었다. 해방 이후 일본인이 도망가다시피 본국으로 떠났고, 잠시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란민이 아미동에 몰려들었다. 당장 몸을 누일 집이 없던 터라 궁여지책으로 공동묘지 위에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열악한 환경에 건축자재를 구하기도 어려울 때라 하는 수 없이 비석과 상석을 이용해 집을 지었다. 골목을 거닐다 보면 마을의 역사를 벽화로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비석과 벽화를 따라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느덧 최민식 갤러리에 닿는다. 최민식 작가는 우리나라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암울했던 시대상을 사진에 담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작가만의 따뜻한 시선이 묻어 있다. 바로 인간을 향한 사랑의 시선이다.
산재환자에게 더 가까이 | 근로복지공단 부산의원 |
감천문화마을이 자리한 부산에는 근로복지공단 부산의원이 있습니다. 부산의원은 근로복지공단의 세 번째 외래재활센터로 지난 7월 개원했습니다. 이로서 부산은 물론 울산과 창원 등 많은 재활환자가 보다 편리하게 전문재활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산병원은 재활의학과와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산재관리간호사를 비롯 작업치료사, 물리치료사 등 숙련된 전문 인력이 함께 양질의 재활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또 근골격계 환자의 수술 이후 급성기 치료 등에 대한 특화진료, 1:1 집중재활치료, 작업능력평가 및 강화 프로그램, 산재관리간호사를 통해 빠른 직업복귀를 도와드립니다. 외래 산재환자, 근골격계 질환, 산재 합병증 등 재활에 특화된 최신 장비와 서비스를 부산의원에서 만나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