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걷는 여행 사진1

인정전의 화려한 단청과 현판

왕가의 비밀 정원, 창덕궁 후원

왕조시대의 모든 권력은 왕에게서 나온다. 그만큼 궁궐은 왕조의 가장 권위 있는 공간이었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 후 경복궁을 준공했다. 이후 조선 3대 임금 태종은 경복궁 동쪽에 창덕궁을 지었다. 창덕궁은 창건 당시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고, 이용 가치도 크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조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후원을 넓혔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은 물론이고 창덕궁, 창경궁까지 소실된 이후 창덕궁이 가장 먼저 복구됐다. 광해군이 정궁으로 쓴 이래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가장 많은 왕이 거쳐 간 조선의 법궁이었다.
창덕궁은 왕과 신하들이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외전과 왕과 왕실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내전, 그리고 궁궐의 정원인 후원으로 나뉜다. 270년 동안 조선왕조의 법궁이었던 창덕궁은 수많은 이야기로 점철돼 있다. 그러나 만추인 요즘엔 역사 이야기도 좋겠지만, 후원에 깃든 올해의 마지막 가을에 푹 빠져 봐야 하지 않을까? 도시의 가로수들도 하루가 다르게 색이 변하고 있다. 짙은 초록색 이파리가 노란색, 붉은색으로 변하고, 힘없는 녀석들은 속절없이 거리에 나뒹군다. 지체할 수 없다. 창덕궁 돈화문을 지나 후원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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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지 일원의 전각

왕가의 정원인 후원을 두고 사람들은 '비밀의 정원'이라 부른다. 누구나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겠지만 왕에게 비밀이란 어쩌면 소박할 수도 있겠다. 편히 쉬는 게 꿈일 수도 있겠단 말이다. 매일같이 조정 대신들과 머리를 싸매고 국정을 논해야 하고 격식과 예의범절을 지켜야 하니 그 또한 숨이 막히는 일일 것이다. 그때 일상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여유를 즐긴다면 막혔던 체증은 내려갈 것이고, 무거웠던 어깨는 날개가 돋은 듯 가벼웠을 게다.
후원은 자연 지형에 인공미를 더하였으나 훼손하지 않고 조화를 추구했다. 후원에서 가장 큰 부용지(보물 제1763호) 주변에는 왕과 왕실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독서를 했던 부용정,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 주합루, 과거 시험을 보던 영화당이 있다. 북쪽에는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 때 지은 애련지에 닿는다. 모름지기 숙종처럼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공간이 있다는 것은 나만의 아지트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의 본능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사대부 가옥을 본떠 지은 연경당(보물 제1770호)이 특별하다. 사대부 가옥과 달리 120칸에 이르는 저택이지만 궁궐에 비하면 소박하다. 연경당을 효명세자가 사대부의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있었지만, 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연경당은 연회장으로 사용됐고, 사대부가 형식으로 개조한 것은 고종 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걸음은 존덕정 일원에 이른다. 창덕궁에서 숲이 가장 깊은 곳이다. 조선의 궁궐에는 모두 연못이 있다. 그러나 계곡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용해서 만든 곳은 흔하지 않다. 옥류천은 응봉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창덕궁에서 산책의 묘미를 만끽하기에 이곳만 한 곳이 없다. 정자들이 띄엄띄엄 있어서 쉬기에도 그만이다.
옥류천을 거닐던 역대 왕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많은 사람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길 원하지만, 정작 왕좌에 오른 왕은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까지 왕위에 오른 태종과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그렇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후원을 지은 왕이 태종이고, 후원을 확장한 왕이 세조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후원도 예외가 아니다. 절대권력을 가진 그들이 귀의한 곳이 자연의 품이라니. 타들어 가던 붉은 단풍도 한풀 겪어 잎새가 빠짝 메말라 간다. 그나마 더 늦기 전에 오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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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가옥을 본떠 지은 연경당의 행랑

'을지로'라 쓰고, '힙지로'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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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는 한국 최초의 주상 복합단지다.

을지로는 간절기(間節氣)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그래서 어느 한 계절을 특정할 수 없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창덕궁이 있고, 경복궁과 덕수궁도 지척이다. 그 옆엔 서울시청이다.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 세운상가도 을지로에 있다. 이곳을 인큐베이터 삼아 성장한 업체만 해도 수없이 많다. 그러다가 강남 개발과 용산전자상가가 급성장하면서 세운상가는 역사 속에 묻힐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2014년부터 도시재생 사업, 이른바 '뉴트로 문화'로 인기를 얻고 있다. 그 결과가 최신 유행을 뜻하는 영어 '힙(hip)'과 을지로를 합친 '힙지로'다. 세운상가 9층 전망대와 세운상가 3층과 대림상가를 잇는 공중 보행교가 대표적인 핫플레이스다. '을지로 루프탑'으로 불리는 이곳은 독특한 콘셉트의 카페가 많다. 골목상권과 달리 주변 경치를 조망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호랑이카페', '이멜다분식' 등이 성업 중이며 새로운 가게가 하루가 멀다고 문을 열고 또 닫는다.
을지로는 미로다. 6·25전쟁 이후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각종 자재와 공구들이 집결하면서 기술자들도 모였다. 그들은 을지로의 미로 같은 골목을 따라 철공소·미싱·조명·타일 도기 골목상권을 형성했다. 그중 을지로 철공소 골목은 지하철 을지로3가역 6번 출구에서 시작된다. 곁가지처럼 큰길에 잇댄 골목에는 을지로 철공소 골목의 또 다른 이름 '입정동'이 있다. 골목에 발을 들이면 예상치 못한 풍경에 발걸음까지 멈칫한다. 영화세트장에 있을 법한 손글씨로 쓴 낡은 간판엔 '선반·밀링·금형' 등의 글씨가 빼곡히 쓰여 있다. 또 양철을 이어 붙인 벽체, 이름 모를 기계 부속품들, 손때와 기름때로 얼룩진 해묵은 공구들이 즐비하다. 한창 잘나갈 땐 금속을 녹이는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고, 여기저기서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용접 불똥이 폭죽처럼 쉬지 않고 튀었다. 그러나 요즘은 철거를 앞둔 데다가 불황까지 겹쳐 무심한 라디오 소리만 골목에 가득하다. 골목 사이로 노포가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며 직장인들의 허기를 달래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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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없는 거리로 변신한 을지로 노가리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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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노포 식당 이남장

을지로 핫플레이스는 골목을 따라 이어진다. 을지로3가역 골뱅이 골목은 구멍가게에서 골뱅이 통조림에 쥐포를 찢어 넣고 양념해서 팔던 것이 현재 골뱅이무침의 원조다. 여기에 마늘과 고춧가루, 대구포와 파채를 함께 넣기도 한다. 또 매운맛을 중화시키는 달걀말이도 빠질 수 없다. 노가리 골목은 봄부터 가을까지가 피크다. 주변 상가들이 문을 닫으면 골목은 일제히 차 없는 거리로 변신한다. 그때를 맞춰 플라스틱 테이블 세트가 놓이고 손님들이 물밀듯 모여든다. 그들은 저렴한 안주와 술잔을 앞에 두고 삼삼오오 모여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가볍게 맥주 한잔하려는 직장인부터, 먼 거리 마다하지 않고 찾은 2030세대까지.
을지로3가역 1번 출구와 가까운 '커피 한약방'은 옛날 허준이 병자를 치료하던 혜민서 자리에 위치해 약방 콘셉트로 문을 연 카페이다. 실내외 분위기는 상해 임시정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세월이 느껴지는 인테리어가 특히 돋보인다. 핸드드립 커피를 사발에 내어주는 것도 특징이다.
60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서울. 왕족이나 서민이나 그들이 누구든 상관없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을 지켜온 역사의 주인공들이 아닌가. 시인 홍찬선 작가는 "서울은 시인의 도시다"라며, "조선과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그에 걸맞게 수많은 시인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라고 했다. 더 모진 찬 바람이 불기 전에 옷깃 세우고 서울 거리를 거닐며 시를 읊조려보는 해묵은 감성을 꺼내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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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대표 노포인 오구반점, 붉은색 건물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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