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걷는 여행 사진1

봄에만 볼 수 있는 용비저수의 아름다운 풍경

노란 수선화 물결로 뒤덮인 백 년 고택, 유기방가옥

아라메길 1구간의 시작은 유기방 가옥이다. 가옥이 있는 운산면 여미리는 달빛예촌이라고도 불린다. 달의 넉넉함을 나눌 수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이름에서부터 여유가 느껴진다. 마을은 반나절 천천히 돌아보기에도 좋다. 여미리 석불입상, 선상군사당, 비자나무, 라전고택, 달맞이 동산 등 여미 9경이 곳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중에서도 충청남도 민속 문화재 제23호로 선정된 유기방 가옥은 빼놓지 말고 들러야 할 명소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여미리 낮은 야산에 자리한 이 고택은 대한제국 시절 지어진 건축물이다. 전형적인 양반 가옥의 형태를 따 동쪽의 사랑채 공간과 서쪽의 안채 공간을 토담으로 구분했다. 안채 앞에 중문채가 있던 것을 1988년에 헐어내고 지금의 누각형 대문채를 세웠다. 구한말 조선의 양반 가옥이라는 독특한 점 때문에 여러 드라마에도 등장했다.

특히 이병헌, 김태리 주연의 〈미스터 션샤인〉에서 이정문 대감의 자택으로 등장했다. 극 중 이정문 대감과 유진 초이가 맞서는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백 년 고택의 멋스러움은 곳곳에서 묻어난다. 햇볕을 가득 담은 대청마루와 장독대까지, 주인장의 부지런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고택의 정취를 좀 더 오래 느끼고 싶다면 하룻밤 머무는 것도 좋다. 유기방 가옥은 안채, 사랑채 등 인원수에 맞게 방을 고를 수 있다.

이른 봄 유기방 가옥을 찾을 이유는 따로 있다. 고택을 온통 뒤덮는 황금 수선화의 물결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주인장이 스무 해 넘도록 정성스레 가꾼 수선화가 어느덧 군락을 이루었다. 100년 된 고택과 어우러진 수선화의 물결은 감동 그 자체이다.
바람에 흔들리며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수선화 군락은 몸과 마음에 봄기운을 불어넣는다.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산책길 곳곳을 거닐다 보면 봄의 향연에 듬뿍 빠져드는 기분이다. 유기방 가옥을 중심으로 고즈넉한 야산에 수령 300년이 넘은 솔밭길이 있다. 수선화 군락을 감상하고 솔밭길 탐방에 나서도 좋다.

  • 계절을 걷는 여행 사진2

    노오란 수선화가 물결처럼 흐른다.

  • 계절을 걷는 여행 사진2

    별처럼 반짝이는 수선화

꽃 잔치가 열리는 숨은 비경

아라메길 1코스 중간을 지나면 개심사를 만난다. ‘마음이 열리는 절’이라는 뜻의 개심사는 충남 4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힌다. 백제 의자왕 14년에 창건된 개심사는 1,3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개심사에서 챙겨볼 것 중 하나가 범종각의 기둥이다. 똑바르고 굵기가 균일한 일반 기둥에 반해, 이 기둥은 모양이 독특하다. 배가 불룩하고 굽은 형태에 위아래 굵기마저 다르다. 나무를 전혀 손질하지 않고 원래 모양대로 썼기 때문이다. 덕분에 자연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범종각으로 탄생했다.

봄에 개심사를 찾으면 꽃 잔치가 벌어진다. 역사만큼 오래된 왕벚꽃과 청벚꽃이 경내를 가득 메운다. 꽃송이가 어린아이 주먹보다 큰 왕벚꽃, 은은한 연둣빛 꽃송이가 신비로운 청벚꽃이 폭죽처럼 피어올라 상춘객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개심사 근처에는 숨겨진 절경이 있다. ‘서산의 알프스’, 혹은 ‘서산의 비밀 정원’이라고 부르는 용비지이다. 꼬불꼬불 논길을 따라 차를 타고 간 뒤 20분 정도를 걸어가면 산속에 숨겨진 작은 저수지가 나온다. 용유지 혹은 용현저수지로 검색해야 찾아갈 수 있다. 소와 말을 방목해서 키우는 목장이 있어서 국내에서 보기 힘든 초목 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다. 계절마다 독특한 이국적인 풍광을 자아내는데, 이른 봄이 으뜸이다. 새벽 나절엔 저수지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산벚꽃과 진달래, 개나리, 버드나무가 통째로 물에 빠진 듯 물그림자를 드러낸다. 물안개가 물러나면 풍경이 반영된 호수는 환상적인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꿈에나 나올법한 선경을 담기 위해 사진 동호인들이 카메라를 들고 이른 새벽부터 이곳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은 사유지여서 방문하기가 쉽지 않다. 서산 한우목장 구역으로 3,000마리의 한우가 외부 병원균에 노출되지 않도록 일반인 진입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번 비경을 본 여행자라면 잊지 못할 풍경이라며 입을 모아 감탄한다.

계절을 걷는 여행 사진1

원형 돌담으로 꾸며진 옥사.

시간이 멈춰 풍경이 된 곳, 해미읍성

아라메길 1코스의 마지막이며 2코스의 시작인 해미읍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읍성은 읍을 둘러싸고 평지에 세운 성으로 해미읍성과 함께 고창읍성, 낙안읍성이 유명하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성벽의 크고 작은 돌들과 누각이 어우러져 옛 정취를 가득 담고 있다. “해미”라는 이름은 “바다가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해미에서 천수만 바다까지는 직선으로 10km가 채 되지 않는다. 본격적인 간척사업이 진행되기 전, 해미 지역은 바다와 훨씬 가까웠을 것이다.

조선 태종은 1416년에 군사를 이끌고 도비산에 올라 서산·태안지방을 살펴보았다. 지형을 연구한 끝에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영를 해미로 옮기도록 결정했다. 이때부터 태종 17년, 세종 3년에 걸쳐 해미읍성이 축성됐다. 거의 230년간 종2품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는 충청도의 군사 중심지로 역할을 다했다. 선조 12년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했다. 해미읍성은 조선 후기 병인박해 때 1,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를 처형했던 순교성지로써 우리나라 천주교 3대 순교지로 알려진 곳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에도 이곳을 찾았다.

해미읍성 안으로 들어가면 우선 탁 트인 시야에 놀란다.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드문드문 한옥이 보인다. 정면에 동헌 뒤쪽 언덕을 제외하면 세 방향이 낮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평야에 자리 잡은 읍성의 매력이 느껴진다. 잔디밭 곳곳에 연날리기하는 사람이 보인다. 연을 빌려주는 상점이 있어서 가오리연부터 화려한 독수리 연까지 다양한 연날리기를 체험해 볼 수 있다. 성내에는 건물이 많지 않다. 조선 시대 관원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해미읍성 객사와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을 했던 동헌, 죄수를 가두었던 옥사, 옛 물건이 가득한 민속 가옥 등이 전부다. 하지만 1973년 복원사업을 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읍성엔 초등학교와 우체국, 민가가 있었다고 한다.

읍성 한가운데 눈에 띄는 거목이 보인다. 천주교인들이 ‘호야나무’라고 부르는 회화나무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고문했다고 전한다. 바로 옆에는 천주교인들을 잡아 가둔 원형 옥사를 복원해 놓았다. 동헌 뒤편 계단을 오르면 소나무 숲이 우거진 언덕이 나온다. 언덕 중앙에 ‘맑은 기운으로 욕심을 비우는 곳’이라는 뜻의 청허정이 있다. 성종 22년 충청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기숙이 지은 정자다. 훈련하던 병사들이 잠시 쉬어가고 문객들이 풍류를 읊던 곳으로 쓰였다. 너른 잔디밭과는 분위기가 다른 호젓한 솔숲은 조용히 산책하기에도 좋다. 빼어난 풍경 덕분에 이 솔숲 역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로 등장했다.

계절을 걷는 여행 사진1

담장을 사이로 수선화와 홍매화가 만개했다.

바다와 산이 만나는 하이라이트, 황금산

서산아라메길 3코스에 속한 황금산은 이름만 들어도 귀가 번쩍 뜨인다. 황금산이라니, 혹시 이곳에 금광이라도 있는걸까. 아니나 다를까. 금을 캤던 동굴이 아직 남아있다고 한다. 여기에 황금산은 특별한 전설을 품고 있다. 황룡이 연평도 근해로 간 조기 떼를 이곳으로 몰고 와 황금조기가 많이 잡히는 바다라 하여 황금바다라 불렀다는 것이다. 황금산은 서산 9경 중 제7경이다.

서해를 마주하는 서산에서 갯벌이 아닌 주상절리와 몽돌해변을 감상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곳이다. 해발 156m의 낮은 산이지만 산을 넘어가면 코끼리 바위가 있는 멋진 해안 절벽을 감상할 수 있다. 코끼리 바위를 찾아가는 여정은 짧지만 녹록지 않다. 계단과 경사로가 연이어 나오고 자갈이 덮인 비탈길을 걸어가야 한다. 가벼운 산책길은 아니다.

가파른 언덕을 넘어 코끼리 바위 쪽으로 내려오면 몽돌해변이 잇댄다. 하지만 코끼리 바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실망하기 쉽다. 조금 더 해변 쪽으로 내려오면 코끼리 바위의 자태를 볼 수 있다. 빛이 길어지는 오후 시간에는 코끼리 바위가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기이한 절벽과 거대한 코끼리 바위, 독특한 주상절리, 몽돌의 조화가 감동적이다. 서산아라메길의 하이라이트답다. 혼자 보기 아까운 비경 앞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봄 마중 나왔던 아라메길의 하루가 저문다.

계절을 걷는 여행 사진1

<미스터 션샤인>촬영지 해미읍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