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에세이 이미지1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어려서부터 TV를 끼고 살던 그를 어머니는 커서 뭐가 될까 걱정했지만 좋아하던 걸 계속하다 보니 드라마, 예능, 영화 보고 음악 들으며 글 쓰고 방송하고 강연하는 일로 먹고살고 있다. 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며 저서로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드라마 속 대사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팔 때가 있다〉 등이 있다.

홍보팀 직원이 나의 정체성이라 생각했지만, 그 회사를 나와 다른 회사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나에게는 나도 모르는 또 다른 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아담소프트라는 회사에서 당시에는 최초로 사이버가수를 만드는 일을 했고, 의학 잡지 편집장으로도 일을 했으며, 벤처 붐이 불던 시절에는 개인방송국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오롯이 프리랜서로 살면서는 참 다양한 분야의 일들을 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좋아했던 영화, 드라마, 공연 같은 걸 자주 보러 다녔고, 마침 인터넷 블로그가 열리던 시점이라 거기에 관련 리뷰나 평들을 써서 올리곤 했다. 그건 내게 대중문화 평론이라는 예상치 못한 길을 열어주었다. 일과는 상관없이 취미로 해오던 것이 현재 지금의 나를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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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부캐’라고도 불리기도 했던 ‘또 다른 나’는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같은 다중우주를 배경으로 여러 가능성의 ‘나’가 존재한다는 SF적 상상은 이제 황당한 이야기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또 다른 나’라는 관점이 이러한 상상을 은유적으로 바라보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또 다른 나’를 만드는 전제는 ‘선택’이다. 어떤 특정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미래가 달라지고 전혀 다른 나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또 다른 나’에 대한 욕망은 〈재벌집 막내아들〉 같은 시간을 되돌려 다른 선택의 삶을 살고픈 욕망이 투영된 이른바 ‘회귀물’이 최근 열풍을 이루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장을 다니던 시절, 명함을 정리해두곤 했던 명함첩이 있었다. 한동안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가(사실 관심도 별로 없었다) 이사를 하면서 우연히 그걸 발견했다. 명함첩 안에 빼곡히 채워져 있는 명함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과연 이 명함의 주인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아마도 이 명함이 말해주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또 일과는 상관없는 영역에서 저마다의 ‘또 다른 자신’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내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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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이 삶의 전부이고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기도 했던 ‘일 중심 사회’는 이제 바뀌고 있다. 또 하나의 일이 업이 되던 ‘평생직장’ 개념도 사라졌다. 일 바깥으로 나와 거기 역시 존재하는 삶을 통해 또 다른 나를 찾으려는 이른바 ‘워라밸’ 사회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명함 한 장이 결코 나를 전부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 명함 바깥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능성들을 선택하는 것에서 또 다른 나의 미래가 생성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가치 있게 해주는 것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