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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설렘이다. 고대 진시황제도 그랬을 것이다.
불로초를 구하려 제주도에 사람을 보냈으니까.
더불어 가장 불운하고 힘든 시절, 가장 연약한 붓으로 가장 강한 작품을 남겼던 작가들의 자취가 제주도 서귀포에 남아 있다. 그 흔적을 따라 서귀포로 향한다.

글. 사진. 임운석(여행작가, 도서 < 내가 선택한 최고의 여행 > 작가)

‘유토피아로’에 조성된 작가의 산책로

남녘의 섬 제주도. 그중에서도 서귀포는 한라산이 삭풍을 막아줘 한겨울에도 추위 걱정을 덜 수 있는 곳이다. 따뜻한 기온 덕택에 도로변에 야자수가 곧추서 있고 돌담 너머에는 감귤이 탱글탱글하게 영글어 이국의 멋을 더한다. 정방폭포, 외돌개, 쇠소깍, 천지연폭포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이어져 사계절 내내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서귀포에 몇 해 전부터 새바람이 불고 있다. 전통적인 자연경관 위주의 관광지에서 문화예술 중심의 관광지로 영역을 확대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너와 내가 만나서 문화를 이야기하며 노니는 유토피아로(遊土彼我路)’다. 2012년 마을미술프로젝트에 선정된 ‘유토피아로’는 서귀포시 송산동·정방동·천지동 일원 올레길 상에 ‘작가의 산책길’을 조성했다. 총 4.3km.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 동안 총 45점의 작품이 설치됐다. 지붕 없는 미술관이란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작품 관람 시간을 제외하면 2시간, 작품까지 꼼꼼히 챙겨봐도 반나절이면 돌아볼 수 있는 길이다.

“가을이 오면 호숫가 물결 잔잔한 그대의 슬픈 미소가 아름다워요. 눈을 감으면 지나온 날의 그리운 그대의 맑은 사랑이 향기로워요.”

사랑과 그리움을 그린 짧은 생애

유토피아로 작가의 산책길은 이중섭 거리에서 시작한다. 이중섭 주거지를 중심으로 이중섭미술관, 이중섭공원으로 이어지는 약 350m 구간이다. 불운한 시대를 만나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으로 생을 마감한 천재 화가 이중섭. 그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원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평안북도 정주군에 위치한 오산학교에 진학하면서다. 거기엔 미국 예일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파리에서 활동한 임용련이 미술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들의 만남은 이중섭이 화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분기점이 됐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은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를 만났다. 1945년 광복한 그해 북한 원산에서 결혼한 그들 사이에 두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당시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급박한 시대였지만 이중섭은 남부러운 것 없는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역시나 시대의 도도한 물결은 그 인생의 순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원산에서 미 해군의 군함에 올라 부산으로 피란했다. 1·4후퇴 때다.

예견된 불행처럼 서귀포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남덕이 부친의 부음 소식을 듣고 아이들을 데리고 급히 일본으로 떠난 것이었다. 그 후 일본은 우리나라와 국교를 단절했고 이중섭은 홀로 남겨졌다. 우여곡절 끝에 1953년 도쿄에서 가족과 감격스러운 해후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주일뿐. 생이별의 고통을 감내하며 상심한 채 귀국했다. 이중섭은 어떻게든 일본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그러자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수없이 많은 그림을 그려냈다. 이중섭 최고의 걸작이 쏟아져 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그런데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달래주던 술이 과했던 걸까. 그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골방에서도 가족과 함께 있어 행복했던 천재 화가

이중섭 거리 길가엔 크고 작은 공방들이 즐비하다. 대개가 이중섭 작품을 모티브로 한 소품을 파는 가게들이다. 60여 년 전에 문을 연 서귀포 최초의 영화관도 있다. 영화상영, 공연, 갤러리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는 동안 몇몇 볼만한 것이 눈에 띈다. 허름한 담벼락의 해묵은 골목길을 도배한 벽화도 그중 하나. 7080세대의 눈을 잡아끄는 추억의 그림, 젊은 연인의 기념사진 속 배경이 될 만한 아기자기한 그림 등.

이중섭이 세 들어 살던 집(제주도 전통 초가집)도 복원돼 있다. 집이라지만 1.4평 크기의 길쭉한 골방이 전부다. 방 한가운데 이중섭의 사진이 놓여 있다. 그 옆엔 ‘소의 말’이라는 시도 있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모로 누워야 한 가족이 잠을 잘 수 있을 만한 소잡하고 초라한 방에 붙은 이 시.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다. 부엌엔 한 번도 밥을 짓지 않은 듯 보이는 녹슨 가마솥도 걸려 있다. 이중섭의 비참했던 제주도 생활을 연상하게 한다. 그와 가족은 피란민 보급품과 고구마로 연명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라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바닷게를 주워 와 허기를 채웠다. 그런데도 행복했다고 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였으므로.

대부분 사람에게 전쟁은 지옥 같은 순간이겠지만 이중섭에게 서귀포는 지상의 유토피아였다.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어서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 해변의 가족 >, < 바닷가의 아이들 >, < 서귀포 바다가 보이는 풍경 >, < 물고기 > 등 30여 점이 그런 유토피아를 담고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게, 물고기 등 소재 역시 서귀포 것들이다.

타박타박 작가의 시선 따라 산책하기

미술관을 나서면 길은 야트막한 언덕을 따른다.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는 동안 볼만한 것들이 눈에 띈다. 길가엔 크고 작은 공방들과 허름한 담벼락을 도배한 벽화도 그중 하나다. 60년 전에 문을 연 서귀포 최초의 영화관은 예술전용 공연장으로 거듭났다. 작가의 산책길은 한산하다. 걷기에 불편하거나 풍광이 나빠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올레길에 몰린 까닭이다.

샛기정공원에는 첫 번째 작품 ‘제주 돌담’을 비롯해 10개의 작품이 더 있다. 제주도 출신의 작가는 물론이고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한 작품들도 함께 있다. 이승수 작가의 <영원한 생명>이 눈에 띈다. 고사목을 재료로 만든 말 형상이다. 울퉁불퉁한 나뭇결이 말의 근육을 보는 듯하다. 눈 내린 한라산을 배경으로 한 해외 작가 스타치올리의 작품은 강렬한 붉은색과 유려한 선과 면이 어우러져 인상적이다. 공원을 거니는 동안 천지연폭포의 물소리가 귓전에 맴돌고 깊은 숲으로 이어진 길이 걷는 맛을 더한다.

길은 기당미술관에 닿는다. 변시지 화백의 작품이 상설전시 중인 곳이다. 작품 <태풍>에 시선이 압도된다. 거센 바람 앞에 외롭게 선 사내의 모습이 가슴 깊이 울림을 전한다. 이어서 발길이 머문 칠십리시공원. 서귀포미술협회에서 협업한 작품 <서귀포의 숲>은 유토피아 갤러리로 운영 중이다. 2층에는 제주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이 설치돼 있다. 서귀포를 소재로 쓴 시비도 천천히 돌아볼 일이다. 시가 인간 언어의 정점이라면 돌에 아로새긴 글씨는 아름다움을 각인하는 장인의 손길이 아닐까.

칠십리교를 건넌다. 다리 난간에 설치된 제주 조랑말 형상이 새연교와 어우러진다. 제주의 빼어난 절경을 해치지 않고 조화를 이뤘다. 작가의 산책길은 유기체처럼 변한다. 숲길, 마을 길을 수시로 들락거린다. 거대한 작품보다 허름한 벽을 다채롭게 채색한 벽화나 담벼락이나 가옥 구조물을 이용해 서귀포 사람들의 삶을 표현한 조형물들이 많다. 마을을 벗어나자 길은 또 한 번 변신한다. 이번에는 탁 트인 바다다. 제주다운 면모다. 자구리 해안에 조성된 문화예술공원에는 이중섭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많다. 작품 <게와 아이들-그리다>가 대표적이다. 이중섭은 자구리 해안에서 물고기나 게를 잡아다 허기를 채웠다고 한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자신의 유토피아를 꿈꿨을 작가의 심성이 느껴진다. 동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주상절리대인 소남머리가 내려다보인다. 거무칙칙한 주상절리대 주변 바다는 한껏 빛을 반사하며 은갈치의 비늘처럼 반짝인다. 발걸음은 이내 서복전시관을 지난다. 서복은 진시황제의 명을 받아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를 구한 인물이다. 소암기념관에 이르러 산책을 마무리한다.

작가들은 서귀포에서 유토피아를 경험했다.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라고 행복한 소회를 남긴 이중섭이나, ‘춤과 같이 쓰고 노래와 같이 쓴다면 참 좋겠다’라고 한 소암 현중화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TIP!

유토피아로 코스는 이중섭미술관~커뮤니티센터~기당미술관~칠십리시공원~자구리해안~소남머리~서복전시관~소정방~소암기념관~이중섭공원으로 이어진다.

찾아가는 길

내비게이션에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중섭로 27-3 이중섭미술관 검색, 대중교통은 공항에서 600번 리무진 버스를 타고 경남호텔에서 내린 후 걸어서 5분 거리에 이중섭미술관이 있다.

문의 : 서귀포종합관광안내소 063-732-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