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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닥친 것 같다는 생각에 빠져있을 때가 이희업 씨에게도 있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하는 절망감. 그러나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당장 지금 걸을 수 있는 작은 발걸음을 내걸었다. 포기가 아닌 작은 한 걸음을 선택한 그를 이은숙 차장이 함께 도왔다. 그렇게 이희업 씨가 환한 희망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글. 백미희 사진. 이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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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찾아온 산재

오랜 공직생활을 마치고 퇴직을 한 후, 이희업 씨는 다시 새롭게 일터에 뛰어들었다. 워낙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늘 부지런하게 해야할 일을 찾는 기질도 있었지만 소중한 두 아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한 몫 했다. 그러나 세상 일이 마음처럼 풀리면 얼마나 좋았을까?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 난관에 부딪혀 한 번의 좌절을 겪었다. 여러 번 재취업을 했지만 노년을 바라보는 그에게 좀처럼 재취업의 기회가 잘 찾아오지 않았다. 실패한 만큼 더 크게 일어서야 한다는 욕심도 있었다. 새로 취업한 택시 회사에서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매일 운행을 이어간 건 그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70시간씩 운행했어요. 그렇게 밤낮으로 쉬지 않고 운전을 해도 사납금을 채우고 나면 남는 돈이 얼마되지 않았죠. 그러니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밤을 꼬박 새우며 택시 운전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날도 교대를 하고 새벽 운행을 나섰는데 익숙하게 다니던 길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거예요.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잘 보이지 않았죠. 잠깐 쉬려고 택시에서 내렸는데 걸음이 마구 꼬이더라고요. 그 길로 병원에 갔습니다.”

2018년 1월, 그는 병원으로부터 뇌경색 판정을 받았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중증질환이었기에 미리 발견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여러 검사 끝에 모야모야병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일을 하다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충격인데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앞으로도 평생에 걸친 관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두 아들의 버팀목이 되기는커녕 짐이 될까 걱정과 두려움이 아버지인 그를 괴롭혔다. 게다가 큰 뇌 수술을 받고 난 후 인지능력 등의 뇌 기능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아 두려움은 더 컸다. 택시회사는 당시 산재처리에도 비협조적이었다. 10개월이라는 긴 싸움 끝에 비로소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그의 인지능력도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몸이 회복되자 그는 곧바로 다시 가장의 몫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은숙 차장은 이희업 씨를 처음 만났을 때,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강한 의지를 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산재노동자들을 곁에서 만나왔지만 사실 모든 분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로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평생에 걸친 후유증을 얻게 되었는데 누군들 그 상황을 바로 이겨낼 수 있겠어요. 이희업 씨는 당시 뇌 수술 후 건강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심리적이나 직업적, 환경적 요인 모두가 많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현재 장해상태를 잘 파악하시고 짧게 할 수 있는 공공 근로라도 시작해보고 싶다고 하셨죠. 본인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셨기 때문에 저도 적극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연결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뇌경색 수술을 마친 후 1년도 되지 않아 이희업 씨는 그렇게 제2의 인생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매일 걷는 것조차 재활훈련이 필요했지만, 그저 묵묵히 버스 계단을 한걸음씩 오르고 동네 공원을 걸었다. 그러는 사이 몸이 점점 나아져갔다. 매일 자연을 벗 삼아 산책하고 재활하다 보니 자연스레 풀과 꽃이 눈에 들어왔고, 이은숙 차장에게 도움을 요청해 조경관리와 관련한 직업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은숙 차장은 곧바로 숙식이 가능한 기숙사 형태의 직업훈련 기관을 연계했다. 이희업 씨가 열심히 직업훈련을 받는 사이 이은숙 차장은 다른 지원도 모색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알게 된 희귀난치성 질환이 시각 장애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곧장 국가장애등록 절차를 도왔다. 이를 통해 국가의 다양한 복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전에는 세상이 저를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저 나 혼자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은숙 차장님 덕분에 세상에 제가 받을 수 있는 도움이 참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 사실이 얼마나 큰 힘인지 몰라요. 근로복지공단에서 나오셨다고 했을 때, 당연히 산재 관련 지원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산재는 물론 각종 사회복지관과 장애인고용공단, 게다가 대한법률구조공단까지 일일이 문의하고 연계하며 저를 도와주셨지요. 저에겐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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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렇게 이희업 씨는 현재 천안시에 소속되어 공원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시민들에게 관련 에티켓을 홍보하는 것이 주 업무다. 뇌경색을 극복하기 위해 매일 산책하던 시절의 경험을 살려, 현재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는 직원으로 손꼽힌다. 이은숙 차장은 이희업 씨의 재취업 연계 이후에도 충청남도시각장애인복지관에 서비스를 의뢰하여 매일 가사와 밑반찬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관련 서비스도 연계했다. 재취업 이후의 삶도 불편함이 없도록 꼼꼼히 살피는 마음에서 나온 배려다. 산업재해로 인한 몸의 재활뿐만 아니라 사회로 다시 복귀할 때 생길 수 있는 다양한 어려움과 불편함을 두루 살피는 것. 한 평생 산재노동자의 곁을 지켜온 경험은 그렇게 속 깊고 꼼꼼한 지원으로 근로자들에게 돌아갔다.

“조경 관련 직업훈련을 받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몸 상태도 좋지 않고, 훈련도 잘되지 않아 우울하고 힘든 날이 있었어요. 사실 교육훈련생들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다 보니 어울리는데 어려움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은숙 차장님이 학원에 직접 전화를 걸어 제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살펴 주시고, 직접 문자도 보내주셨어요. 제가 겪는 힘든 상황을 모두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이은숙 차장님이 보내준 문자를 같이 훈련하던 교육생들에게 보여준 이후로는 무사히 교육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자신감을 조금씩 되찾을 수 있었어요. 혼자가 아닌 함께 하나씩 해결해 나간다면 결국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이은숙 차장은 이희업 씨처럼 의지를 가진 산재노동자라면 언제든 직장 복귀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힘주어 말한다.

“아무리 좋은 지원 정책이 있어도 결국 근로자의 의지가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이희업 씨는 그런 면에서 모범이 되는 분이지요. 저는 이희업 씨가 의지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작은 물꼬 하나를 틔워드린 셈입니다. 결국 꾸준히 훈련을 받고 재취업에 성공한 건 모두 근로자분께서 직접 해내신 일이니까요. 다만 저희가 드린 도움을 발판 삼아 제2의 인생을 일궈내시는 분들을 보면 큰 보람을 느낍니다. 최근 근로복지공단 소속 병원에서 산재를 입은 근로자들에게 이희업 씨처럼 재활 후 새로운 희망을 찾은 분들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런 사례를 널리 알려 더 많은 분들이 절망의 끝에서 다시 새 삶을 살아가실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깊은 불행의 늪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다시 회복할 길은 반드시 있다. 다시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만 있다면 결국 밝은 희망의 한 가운데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결국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나선 이희업 씨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기꺼이 손 내밀어 줄 이은숙 차장 그리고 근로복지공단이 함께 있다. 밝은 얼굴의 이희업 씨가 말한다. 산재라는 긴 시련의 끝에 다가올 분명한 행복을 믿길 바란다고. 그 믿음이 새로운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