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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에 낙엽이 나뒹굴면 떠나고 싶은 충동이 솟구친다.
다른 때는 잘 지내다가도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렇다.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마음대로 떠나기엔 어깨에 짊어진 짐이 너무 많고, 무겁다.
그래도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까, 하루만 시간을 내자.
가까운 곳에 마지막 가을을 붙잡아 뒀으니.

글. 사진. 임운석(여행작가, 도서 <내가 선택한 최고의 여행> 작가)

가을에 양평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

운전면허를 따던 해에 경차를 중고로 샀다. 국민차라 부르던 그 차는 문을 닫을 때 ‘탕’하는 철판 소리가 났다. 듣기에도 민망한 그 소리에 이어 큰 화물차 옆을 지나갈 때면 왠지 차가 화물차에 빨려 드는 듯한 느낌도 지울 수 없다. 화물차가 많이 다니는 구간을 장시간 운전하고 나면 팔이 묵직했다. 하지만 그 작은 차 덕분에 참 많은 곳을 다녔다. 가을이 오면 가슴 저 밑에서부터 떠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가 보다. 특히 즐겨 찾은 곳이 강가였다. 돌이켜 보니 뻔질나게 강변을 찾을 때가 가을이었다. 자동차 카세트 플레이어에서는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이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가을이 오면 호숫가 물결 잔잔한 그대의 슬픈 미소가 아름다워요. 눈을 감으면 지나온 날의 그리운 그대의 맑은 사랑이 향기로워요.”

아마도 가을 강변 풍경은 사계절 가운데 가장 감성적이지 않을까. 특히 이른 아침에 안개에 휩싸인 강의 모습은 울긋불긋한 단풍보다 더 서정적이고 몽환적이다. 가을 감성이 물씬한 곳, 누구나 감성 부자가 될 수 있는 곳, 바로 경기도 양평이다. 양평은 숲속의 귀족이라 불리는 자작나무와 가을의 정취가 물씬한 강이 어우러진 수채화 같은 곳이다. 물과 숲이 만난 그 풍경은 지친 일상에 여유를 선사할 것이며, 생각에 쉼표를 찍고 마음에 더 넓은 공간을 선사할 것이다. 양평 여행을 이맘때 떠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물의 고운 숨결이 발목을 붙잡는 곳, 두물머리

11월의 아침은 스산하다.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는 겨울 외투를 입어야 할 정도로 싸늘하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시나브로 변한다면 적응하기 쉽겠건만 계절의 변화는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두툼한 옷에 깃까지 빳빳하게 세운 채 두물머리로 향한다. 두물머리는 양수리(兩水里)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북한강과 남한강, 두 물이 합류하는 시작 지점이라는 의미다. 북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해서 굽이굽이 돌아 강원도 철원과 화천을 지나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 이른다. 남한강의 여정도 그에 못지않다. 강원도 태백 금대산 검룡소에서 발원해 영월, 평창, 단양을 적신 뒤 물길을 서쪽으로 틀어 충주를 지나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에 닿는다. 서로 다른 곳에서 발원해 다른 여정을 거쳐오지만, 두 강은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숙명에 묶인 듯 흘러온 것이다. 하지만 해 아래 영원한 것이 없듯, 만남 뒤에는 이별이 있기 마련. 하나가 된 두 물은 서해에서 또 다른 이별을 맞이한다. 회자정리다. 자연도 인간도 아니, 우주 만물이 마치 일정한 섭리에 따라 움직이도록 이미 설정된 것은 아닐까.

이른 아침에 찾은 두물머리는 어김없이 안개가 자욱하다. 마치 강에 불을 지핀 듯 안개가 수증기처럼 피어오른다. 가을엔 으레 울긋불긋한 풍경을 기대하지만, 안개에 갇힌 단풍은 무채색에 가깝다. 때로는 무채색이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한때 두물머리는 꽤 번성했다. 강원도 정선과 충북 단양에서 목재를 가득 실은 배들이 서울 뚝섬과 마포나루에 가기 전 꼭 한번 들러야 하는 나루터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자연스레 상권이 형성됐으며 돈이 돌았다. 하지만 1973년 팔당댐이 생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서울을 오가던 뱃길은 육로가 대신했고, 이 일대에서 어로 행위와 선박 건조 등이 전면 금지됐다. 그린벨트로 묶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큰 선물로 되돌아왔다. 일상을 잠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휴식처로 거듭난 것이다.

두물머리의 고요한 풍경을 즐기려면 두물머리 인근을 한 바퀴 도는 물레길(10km)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다. 양수역에서 출발해 세미원, 두물머리, 다온광장, 양수리환경생태공원, 남한강 자전거길 등을 두루 들른다. 이번엔 굳이 다 걷지 않고 두물머리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강을 겹겹이 감싸 안은 산자락과 강물의 고운 숨결이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것이다. 강변을 따라 이어진 야트막한 기와 담장이 정겹다. 그 너머에 뱀섬이 안개에 갇혔다. 안개는 일출과 함께 언제 피었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진다. 안개가 걷힌 강변의 바람은 습하지 않다. 오히려 메말랐다. 바람을 손으로 잡을 수 있다면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며 부서질 것처럼. 걷힌 안개 뒤를 이어 사람들이 하나둘씩 밀려온다. 강물 소리만 흐르던 적요한 강가에 인기척이 겹쳐온다. 400년을 한자리에서 지켜온 느티나무와 황포돛배는 언제나 그랬듯이 두물머리의 주인처럼 그들을 맞이한다. 사람들은 가을 감성을 가슴속에 담기 바쁘다.

숲이 주는 선물을 담다, 서후리숲

두물머리처럼 조용하지만 핫한 곳, 서후리숲으로 향한다. 두물머리에서 자동차로 30~40분 거리에 있다. 숲은 조용하기 마련인데 핫하다니…,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BTS(방탄소년단)가 이 숲을 찾은 이후 핫플레이스로 등극했다. 2014년에 문을 연 서후리숲은 BTS가 다녀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양평 토박이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숲이었다.

숲 조성은 1999년부터다. 하지만 지지부진하다가 2004년부터 속도가 붙었다. 문제는 2010년에 불어닥친 태풍 곤파스였다. 이때 대부분의 잣나무가 쓰러져 큰 피해를 봤다. 상흔을 지우는 데만 3년, 2014년에야 비로소 개장했다. 전체 면적은 100만㎡지만 일반에 개방하는 곳의 면적은 전체의 30~40% 정도다. 서후리숲의 백미는 울창한 자작나무숲이다. 1980년경에 심었으니 이제 불혹이 넘었다.

서후리숲은 양평 청계산과 중미산 사이에 포근하게 안겨있다. 사계절 가운데 초록 물결이 넘실거릴 때와 울긋불긋하게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BTS가 2019년 앨범 재킷을 촬영한 계절은 초록이 세상을 뒤덮은 때였다. 가을에 초여름의 푸르름을 가득 담은 BTS의 사진을 함께 감상할 수 있으니 두 계절을 여행하는 셈이다. 산책 코스는 1시간 정도 걸리는 A코스와 30분 정도 걸리는 B코스로 나뉜다. 시간이 여유롭다면 두 코스를 모두 돌아봐도 좋다. 입구를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서후리숲에 안긴다. 너른 잔디밭을 마당 삼은 카페 뒤에는 구상나무가 촘촘하다. 산책로 주변에 여름 한 철 고운 얼굴로 탐방객을 맞았을 수국이 장작처럼 푸석하게 메말라 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가을 공기와 함께 흐른다. 길을 따라 수목이 이어진다.

황금측백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작은 연못 건너편에는 잣나무숲이 우거진다. 태풍 곤파스를 이겨낸 녀석들이다. 가지가 흐드러진 귀룽나무는 붉게 물들었다. 이어서 서후리숲이 자랑하는 단풍나무숲을 마주한다. 탐방객들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구간이다. 마음껏 화려한 색에 취한다. 마음마저 흐뭇해질 무렵 숲 어디선가 탄성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잰걸음을 옮긴다. 도착한 곳은 자작나무숲이다. 잎을 떨군 나무도 있지만, 하얀 나무껍질과 노란 잎이 자아내는 모습은 가을 감성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숲에서 올려다본 가을 하늘엔 파란색이 가득하다. 벤치에 앉아 숲속에서 나는 다양한 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잎새가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는 발랄하고, 낙엽 밟는 소리는 묵직하다. 단잠에서 깨어난 듯 갑자기 날아오르는 새의 날갯소리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빠르게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처럼 날카롭고 매몰차다. 앞만 보고 걷던 걸음, 숲에서만큼은 앞뒤를 돌아본다. 바람에 묻어오는 가을 냄새와 눈을 편안하게 하는 고운 색감이 모처럼 떠난 짧은 가을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TIP!

양수리(두물머리)는 양평의 작은 면 소재지지만, 이곳엔 수도권에서 소문난 명소가 많기로 유명하다. 사진 출사지로 유명한 두물머리, 경기도 지방 정원 1호인 세미원, 남한강 자전거길이 죄다 모여 있다. 그러니 왕복 2차선이 고작인 작은 시골 동네가 주말엔 북새통이다. 하지만 이른 아침에 찾으면 도로 사정도 한결 수월할 뿐만 아니라 고즈넉한 두물머리의 풍경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서후리숲은 매주 수요일 휴무다.

내비게이션 정보

두물머리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두물머리길 7-2 공영주차장

서후리숲 :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거북바위1길 200

두물머리관광안내소 031-770-8700

서후리숲 031-774-2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