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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으로 물든 화려한 계절 가을.
그 화려함 뒤에는 지난여름의 혹독함이 깃들어 있고,
다가올 겨울을 이겨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스며있다.
그래서 조물주는 가을을 짧게 만들었으리라.
세조가 걸었던 길을 걸으며 가슴 속 구리거울을 꺼내어 닦아보자. 내 얼굴을 비춰보자.
그리고 용서하고 사랑하자.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글. 사진. 임운석(여행작가, 도서 <내가 선택한 최고의 여행> 작가)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풍수의 아이러니

2019년에 개봉한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 여행에 앞서 챙겨본 영화다. 영화는 단순하면서도 기발했다. 영화의 배경은 조선팔도를 무대로 풍문을 조작하고 민심을 뒤흔드는 광대 패가 어느 날, 조선 최고의 권력자 한명회로부터 입에 담지 못할 제안을 받으면서 전개된다. 제안인즉슨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세조의 미담을 만들어내라는 것.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1417~1468)는 토지와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경국대전을 편찬해 조선을 법치국가로 이끄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하지만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물 론, 수많은 신하를 죽인 잔혹한 피의 군주라는 비난도 동시에 받고 있다. 인과응보일까. 영화 속 세 조는 왕위에 오른 뒤 극심한 피부병에 시달렸으며 노후에는 자신의 사후 홀로 남을 세자의 안위에 대한 불안감으로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 것으로 묘사된다. 이에 권력자 한명회는 빗나간 민심을 수 습하고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풍문을 조작하기에 이른다. 영화에는 세조실록에 기록된 40여 건의 기이한 현상 중에서 7건을 에피소드로 다루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이번에 여행할 충청북 도 보은이다.

내륙 한가운데 자리한 보은은 삼국시대 북으로 진격하려는 신라와 남하하려는 고구려, 동진하려 는 백제가 하루가 멀다고 다투던 국경 분쟁지인 동시에 교통의 요충지였다. 가장 세속적일 것 같은 이곳에 속세를 떠난 산이라는 일컫는 속리산(俗離山)이 있고, 그 산기슭에 진리가 머무르는 법주 사(法住寺)가 있다. 물과 기름이 만난 듯 어울리지 않는다.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풍수지리의 아 이러니인 셈이다.

그로부터 천추의 세월이 지난 1464년. 피의 군주 세조가 보은을 찾았다. 보은의 역사를 알기에 그 의 발걸음이 새삼 궁금하다. 다툼이 끊이지 않던 격전지에서 풍기는 피 냄새를 맡은 것일까? 아니 면 피 묻은 손을 씻기 위한 참회의 걸음이었을까? 후자에 방점을 찍고 싶다. 모름지기 세조는 재임 기간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다. 인과응보겠지만 세조는 그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속죄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조가 속리산으로 사은순행(謝恩巡幸)한 이유는 두 가지일 듯하다. 첫째는 복천 암에 있던 신미대사를 만나 참회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속리산에서 요양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피의 군주, 길에서 길을 묻다

세조가 행차했던 길을 오늘날 걷기 좋은 길로 조성해 ‘세조길’이라 부른다. 세조길은 법주사 탐방 지원센터를 지나 오리숲길, 법주사삼거리, 수원지, 태평휴게소, 목욕소, 세심정, 복천암에서 원점 회귀하는 6km 남짓한 구간이다.

세조길이 있는 속리산에 가려면 정이품송을 먼저 만난다.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은 600살이 넘은 노거수로 나무에 품계가 있다. 나무에 품계를 내린 사연은 어가(御駕)가 소나무 아래를 지날 때 나뭇가지에 걸릴까 염려하여 “연(輦) 걸린다”고 소리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무사히 통과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세조는 그 나무에 오늘날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2품의 품계를 내렸다고 한다.

걸음이 정이품송을 뒤로하면 주차장과 탐방지원센터를 지나서 소나무의 기품이 느껴지는 오리숲에 이른다. 오리숲이란 법주사 아래 상가 거리부터 법주사까지의 거리가 10리의 절반인 5리 정도 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예전 오리숲길엔 황톳길이 조성돼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코로나 대유행을 맞아 요즘은 황톳길이 무색하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솔향을 내뿜는 울창한 침엽수와 멋스러운 조각품들이다. 조각품들 가운데 초대형 밥솥이 이채롭다. 속리산 문장대 높이인 1,058명 분의 비빔밥을 한꺼번에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오리숲길이 법주사 삼거리에 이르자 세조길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세조길은 휠체어나 유모차가 다닐 수 있는 무장애 탐방로와 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나뉜다. 조붓한 숲길에는 활엽수가 유난히 많은데 색채의 마술에 걸려든 듯 형형색색 곱디곱다. 곧이어 나무데크길이 펼쳐진다. 길은 갈지자처럼 한참 이어지더니 법주사 저수지 물막이 둑에 이르러서는 고요한 저수지를 감상이라도 하듯 가장자리를 따라 잇댄다. 저수지에는 물비늘이 반짝이고 그 곁엔 억새가 지키고 섰다. 억새가 작은 바람에도 춤추듯 흔들린다. 권력 앞에 무릎을 꿇었던 생육신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반면 어지간한 바람엔 미동하지 않는 아름드리나무에서 사육신의 올곧은 신의가 엿보인다. 저수지를 감싼 숲길에는 사람의 속눈썹을 닮았다는 눈썹바위가 있다. 바위 아래엔 두세 명이 앉아서 비바람과 한낮의 더위를 피할 만큼 그늘이 넉넉하다. 인지상정이듯 세조도 이 바위 아래에서 쉬었다고 한다.

세조길은 참회하며 걷는 구원의 길

바람이 고요해진 틈을 타 저수지에 하늘이 담기고 구름이 멈춰 선다. 그뿐만이 아니다. 속리산 수 정봉이 저수지에 누워 낮잠을 자듯 평화롭게 안겨있다. 세조는 이 길을 걸으며 속리산이 전하는 메 시지를 듣지 않았을까.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피 튀기는 경쟁이 아니라 관용과 배려와 포용이다. 마치 속리산의 너른 품에 저수지가 안겼는데 그 저수지 품에 또 속리산이 안긴 것처럼 말이다. 이 메시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일상의 지난한 일들 가운데 모처럼 숲을 찾아 마음의 위로를 받고 상처에 딱지가 생기고 새살이 돋는 경험을 한 번쯤 해 봤을 테니까.

저수지 끝자락엔 태평휴게소가 있다. 저수지와 맞닿아 있어 쉬어가기 좋다. 휴게소를 지나 멀지 않 은 곳에 ‘목욕소’가 있다. 세조가 이곳에서 목욕한 뒤 목욕소라 부른다. 오색으로 물든 단풍들이 숲 길을 예쁘게 채색하고 길섶에는 키 작은 조릿대가 무성하다. 조릿대는 대나무 중에서도 약성이 가 장 강해 화병을 다스리며 간의 열을 풀어 주어 불면증, 신경쇠약은 물론 피부병에도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속리산은 우리나라 산지 가운데 조릿대 군락지로 유명한 곳이다. 세조가 이곳에 요양 온 이유가 더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세속을 떠나 마음을 씻는다는 세 심정은 현재 휴게소로 사용 중이다. 문장대나 천왕봉에서 하산하는 등산객들이 이곳에서 휴식하 며 허기를 채운다. 마음의 깊은 상처와 무거운 짐에 짓눌린 마음을 씻는다는 정서적 공간이 육신의 공간으로 변한 듯해 아쉽다. 세조길은 세미정 너머에 있는 복천암에서 마무리된다.

세조는 왕좌에 오른 날부터 말년까지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양심과 죄책감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조처럼 자신이 저 지른 잘못으로 죄책감에 두려워 떨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불운한 시대를 살다간 청년 시인 윤동 주(1917~1945)는 ‘구리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 뒤 참회록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부 끄러움이 얼마나 컸으면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아보자 했을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 끄러움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을 닮아가긴 어렵더라도 한유한 가을날 구리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을 볼만한 여유쯤은 챙겨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세조길을 걸으며 각자의 구리거울을 닦아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Travel tip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경내에 수많은 문화재가 있어 하나씩 챙겨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 팔상전(국보 제55호),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등의 국보와 보물을 비롯해 무려 96종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특히 높이 33m에 이르는 청동미륵대불은 사용된 청동이 100여 톤이 넘는 거대한 불상으로 천년고찰의 위용을 드러낸다. 2018년 6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등과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내비게이션 정보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

속리산국립공원 사무소 043-542-5267

글쓴이 임운석은 한때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이후 직장을 다니던 중 아내와 ‘평생 여행만 하자’고 약속한 뒤, 여행작가로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객원 사진가를 지냈으며, 포토에세이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일상에서 여행의 묘미를 찾는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작가가 선택한 최고의 여행지를 소개한 《내가 선택한 최고의 여행》 등 다수의 책을 썼다. 방송 활동도 왕성해 지난해부터 KBS 2 <굿모닝 대한민국 라이브>에 출연 중이다. 여행 인문학 강사로도 인기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