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선우현정
임상심리전문가 / 정신건강임상심리사
노동절이 비로소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노동절 제정 이후 63년 만이다.
사회적 합의에 의한 쉼은 노동자의 사회적 공로를 인정하여,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리학에서 노동은 단순한 생계 유지 수단이 아니다. 발달심리학자 에릭슨(Erik Erikson)은 성인기의 노동을 발달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이는 학령기부터 시작되는데, 학령기 아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완수하여 성취감을 느끼는 과정을 통해 “나는 잘할 수 있다”는 유능감을 형성해 나간다. 그리고 이 경험은 성인기까지 이어져, 개인적인 과제를 벗어나 사회에 이바지하는 일을 수행함으로써 ‘생산성’을 느끼게 하고, 반대로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는 ‘침체성’으로 인해 불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의 조건은 사랑할 수 있고, 놀이할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일을 통해 개인은 현실적인 규칙에 따라 본능적인 욕구를 조절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방식으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건강한 인간은 욕구를 억누르거나 날것 그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조절된 방식으로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 경로 중 하나가 일인 셈이다. AI 시대가 도래하여, 일부 사람들은 앞으로 인간의 노동이 사라질 거라고 예언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노동은 생계유지 그 이상의 의미, 즉,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사회와 연계되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대체되기 어려울 것이다. 노동의 형태 자체가 변화되는 일이 있더라도, 노동을 통해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인간의 습성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이 우리 삶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면, 그만큼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는 영역도 필요하다. 대상관계 심리학에서는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자아를 견고하게 하는 원천을 ‘관계’라고 보았다. 대상관계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관계는 치유의 힘이 있다. 특히 가족은 개인에게 ‘안아주는’ 환경이 되어 사회에서 지친 자아를 위로하고 지지해 주는 역할을 한다. 원가족과의 경험이 부정적이었더라도, 지금의 배우자, 가족 구성원과 맺는 건강한 관계는 과거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수정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는 일터에서 때로 긴장하고, 경쟁하며,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반면 가정은 무조건적인 수용과 휴식이 허락되는 안전한 공간으로, 온전한 나 자신으로 돌아와 마음의 피로와 상처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노동이 세상 속에서 효능감을 통해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라면, 가정은 조건 없는 수용을 통해 나의 존재를 인정받는 곳이다. 이 두 개의 축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만족스러운 삶을 지속할 수 있다. 꾸준한 노동이 가정을 지키고, 가정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을 때 다시 일터로 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노동절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산업재해를 겪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다. 이들의 고통은 개인의 불운으로 환원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거쳐 온 사회적 활동의 결과이기에, 이들의 희생을 잊지 말고, 여전히 남아 있는 위험과 책임을 돌아보는 사회적 성찰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산업재해를 극복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긴 시간이 소요된다. 겉으로 보이는 기능 회복뿐만 아니라, 자존감과 마음의 회복을 통해 다시 총체적인 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심리학 및 보건학계의 수많은 연구를 살펴보면, 산업재해 회복의 핵심 자원으로 가족의 지지를 꼽는다. 가족의 지지는 산업재해로 인한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정신병리로 발전하지 않도록 돕는 완충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1). 이러한 맥락에서, 미혼 상태의 노동자보다 기혼 상태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부터 회복력이 훨씬 높았다는 연구결과가 있고2), 단순히 임상 치료에만 집중한 집단보다 가족 상담과 직장 개입을 병행한 집단의 사회복귀율이 훨씬 높았음이 밝혀지기도 했다3).
참고문헌
1) Cohen, S., & Wills, T. A. (1985). Stress, social support, and the buffering hypothesis. Psychological Bulletin, 98(2), 310–357.
2) Brewin, C. R., Andrews, B., & Valentine, J. D. (2000). Meta-analysis of risk factors for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in trauma-exposed adults. Journal of Consulting and Clinical Psychology, 68(5), 748–766.
3) Loisel, P., Durand, M.-J., Berthelette, D., Vézina, N., Baril, R., Gagnon, D., Larivière, C., & Tremblay, C. (1997). Disability prevention: New paradigm for the management of occupational back pain. Disease Management & Health Outcomes, 2(4), 351–360.
심리학은 우리에게 인간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성장하는 존재임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강인한 체력이나 정신력 때문이 아니라, 돌아갈 곳이 있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노동은 개인이 자신의 역할과 가치를 확인하며 사회와 연결되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지속적인 긴장과 소진을 동반한다. 이러한 부담이 누적될수록, 이를 완충하고 정서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관계적 기반이 필수적이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해 낸 노동자에게 응원을 보낸다. 하루의 끝에 허탈함이 남지 않도록, 돌아온 그곳에서 평온함이 충분히 채워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