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람이 불고 해가 조금씩 짧아지는 가을은, 잠시 속도를 늦추고 책 한 권에 마음을 맡기기에 잘 어울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독서는 어쩌면 정보를 더 얻는 일에 앞서, 흩어져 있던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 리딩 파티나 사일런트 북클럽처럼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용히 각자의 책을 읽는 모임이 주목받는 것도 이런 흐름과 닿아 있다. 흔히 떠올리는 독서모임처럼 한 권을 함께 읽고 감상을 나누는 방식이 아니다.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가져와 일정 시간 말없이 읽는다. 누군가는 소설을 펼치고, 누군가는 에세이나 인문서를 읽는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읽는 책도, 책장을 넘기는 속도도 제각각이다.
글. 이희수 칼럼리스트
무언가를 꾸준히 이어가는 데는 처음의 의욕보다 반복할 수 있는 작은 습관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책을 읽겠다는 목표를 세우기보다 하루의 어느 한때를 책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만들어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인나미 아쓰시의 저서 『1만권 독서법』에서는
아침 10분 독서처럼 매일 비슷한 시간에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처음부터 어려운 책을 선택할 필요도 없다. 지금 손이 가는 책, 읽고 싶은 책부터 펼치는 것이 먼저다. 바로 이 지점에서 리딩 파티와 사일런트 북클럽의 방식도 이해할 수 있다. 혼자였다면 무심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을 시간에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기로 약속한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서 누군가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연스럽게 책에 손이 간다. 한 시간 동안
몇십 페이지를 읽는 사람도 있고 몇 페이지에 머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 문장을 오래 곱씹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누가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각자 원하는 책을 자신의 속도로 읽는다. 함께 있기 때문에 시작은 조금 쉬워지고,
책을 펼친 뒤의 시간은 온전히 각자의 것이 된다.
다만 책을 펼쳤다고 해서 그다음부터 모든 것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작했으니
끝까지 읽어야 한다’, ‘읽었으니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는 마음이 또 다른 부담이 되기도 한다.
또 쉬운 책보다 어려운 책을 읽어야 제대로
독서한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인나미 아쓰시는 『1만권 독서법』에서 이런 부담부터 조금 내려놓자고 말한다. 한 권의 책을 오랫동안
정독한다고 해서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잊게 된다면, 한 권에서 모든 것을 얻으려 애쓰기보다 여러 책을 만나면서 그중 자신에게 남는 작은 조각들을 모아가는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플로우 리딩’은 그런 독서에 가깝다. 책의 내용을 하나하나 머리에 저장하려 하기보다 흘러가는 내용을 따라가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남긴다. 음악을 들을 때
모든 음과 가사를 외우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책도 조금 더 가볍게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어떤 책은 한 문장만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
어떤 책은 내용을 거의 잊어버렸는데도 이상하게
한 장면이 오래 남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한 권에서 얼마나 많이 기억했느냐보다
무엇이 내 마음에 남았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남은 문장을 직접 써보는 ‘한 줄 샘플링’도 이런 독서와 잘 어울린다. 눈으로 읽고 지나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손으로 문장을 다시 옮겨보면 잠시라도 그 문장에 머물게 된다. 왜 이 문장이 눈에 들어왔는지, 지금의 나와 어디에서 맞닿아 있는지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는 시간도 생긴다.
겉으로 보기에 독서는 꽤 정적인 활동이다.
가만히 앉아 눈으로 글자를 따라가는 것이
전부인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조용한 시간 안에서 생각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가와시마 류타는 『독서의 뇌과학』에서 디지털 기기의 과도한 사용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며 독서의 의미를 다시 들여다본다.
독서는 가만히 앉아 눈으로 글자를 따라갈 뿐이지만,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고 앞뒤 내용을 연결하며 장면을 상상하는 동안 뇌에서는
다양한 활동이 일어난다. 책에는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대상으로 짧은 글이나 단어를 소리 내어 읽도록 한 연구도 소개된다.
꾸준히 읽기 훈련을 한 결과 인지 기능이
향상되는 양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밖에도 독서와 소리 내어 읽기 등이
뇌 활동과 인지 기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양한 연구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에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정서적인 교류도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면 독서의 시간은 결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몸은 조용히 앉아 있어도 생각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스마트폰 화면을 빠르게 넘기며 짧은 정보를 연이어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집중이다. 한 문장에 머물고 생각을 이어가며, 자신의 속도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시간이다.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마음에 남는 문장이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이토 다카시가 지필한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에서도 독서는 지식을 많이 쌓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책은 일과 삶에서 막막한 순간에 다른 시선을 보여주기도 하고, 눈앞의 문제에만 매달려 있을 때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을 바라보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위로가 되고, 어떤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기억하는 문장은 다르다. 누군가는 관계에 관한 문장에서 멈추고, 누군가는 일이나 선택에 관한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책의 내용이 달라서라기보다 그 순간 각자가 안고 있는 고민과 관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독서는 책의 내용을 읽는 데서 조금 더 나아간다. 수많은 책 가운데 왜 하필 오늘 이 책을 골랐는지, 왜 다른 문장은 지나쳤는데 이 문장에서 눈길이 멈췄는지, 왜 이 한 문장은 한 번 더 읽고 싶어졌는지를 들여다보게 된다.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지금의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수많은 정보와 다른 사람의 목소리 속에서 살아간다. 그 사이에서 내가 무엇을 생각 하는지는 자꾸 뒤로 밀리기 쉽다. 책을 읽는 시간에는 잠시 그 순서가 바뀐다. 세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동시에 그 이야기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래서 책을 읽는 일은 어쩌면 세상에서 잠시 멀어지는 일이 아니라, 분주한 일상 속에서 놓치고 있던 자신에게 다시 가까워지는 일에 가깝다. 책을 읽는 일은 결국, 나를 읽는 일이기도 하다.
※ 참고자료: 가와시마 류타의 『독서의 뇌과학』, 인나미 아쓰시의 『1만권 독서법』,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