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인류가 마주한 진정한 위기는 일자리 상실이라는 경제적 공포를 넘어,
인간의 존재 가치와 정신적 주도권이 위협받는 존엄의 위기에 있다.
과거에는 지능과 창의성이 인간만의 영역이라 믿었으나,
AI가 그 영역을 빠르게 잠식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혼란과 실존적 허무주의를 맞이하게 되었다.
글. 선우현정 임상심리전문가ㆍ정신건강임상심리사
인간의 존재 가치가 위협받는 이 시점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특성이다.
AI와 비교되는 인간의 대표적인 특성은 불완전함이다.
이 불완전함은 상당 부분 정서적 영향으로부터 기인하는데, 그간 인간의 감정은 이성적인 판단을 저해하고 심리적 불안정을 가져오는 말썽꾸러기 취급을 받아왔다.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감정을 가장 인간다운 동력으로 본다. 불쾌한 감정을 통해 고뇌하고 성장하며, 행복감을 통해 만족하고 베푸는 경험을 하면서 인간은 서사적인 존재가 된다. AI는 학습 데이터가 바뀌면 결과 값을 수정할 뿐이지만, 인간은 감정 변화를 통해 심리적인 과정이 보다 폭넓어지며, 인격적인 도약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특히 고통스러운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수용하며 통합해 나가는 과정은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개인 특유의 심리적 역사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감정으로 인해 겪는 수많은 시행착오는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약점이 아니라, 개개인만의 독특한 자원을 축적하는 과정이 되는 셈이다. 이 시대에서 인간의 불완전함은 이전보다 더 고유한 가치가 있는 재산이 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기계적인 완벽함에 압도되기 보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가치를 재정립하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AI는 우리 삶에 적극적으로 스며들고 있다. AI에게 기계적인 잡무를 넘기는 것은 주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핵심으로 근접하기 위한 주도적 선택이 될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 Sigmund Freud는 건강한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세 가지 요인으로 일, 사랑, 그리고 놀이를 꼽았다. AI가 기술적 노동에 집중할 때, 인간은 실존을 증명하는 본질적인 영역에 몰입할 여유를 얻을 수 있다. 생존을 위한 기계적인 일에서 벗어나 자아를 실현하는 창조적인 일에 집중하고, 소원해진 주변 사람과 연대하고 사랑하며, 목적 없는 즐거움인 놀이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
특히 놀이는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무용한 즐거움에 빠짐으로써 목적과 성과로부터 일시적인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활동이다. 무용한 즐거움은 외부 평가나 보상을 전제로 하지 않기에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드문 시간이 되고, 인간은 성취를 해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경험하는 주체로 존재하게 된다. AI 시대를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최신기술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이 아니고, 기술이 확보해준 여백을 삶의 본질적 가치로 채워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운동의 중요성은 늘 강조되어 왔다. 앞으로는 신체 근력뿐만 아니라, 인지적 근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다. AI가 순식간에 정답을 제시하는 시대가 오면서, 인간의 인지적인 과정이 단순화되기 때문이다. 근육을 키우기 위해 무거운 무게를 견디는 저항 운동이 요구되듯, 인간의 인지적 역량을 기르거나 유지하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만족을 지연하고 지루함을 견뎌내는 인지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지식의 습득 과정이 지나치게 단순할 경우 우리의 뇌는 스스로 사고하는 방법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질 수 있다. 실제로 고등학생 남자 아이가 병원에 심리평가를 받으러 왔었다. 학교 부적응을 주호소 문제로 내원한 아이로 잦은 배변실수를 하고 위생관리를 하지 못하는 등, 기본 생활 습관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는 ADHD 진단을 받았다. 자극적인 활동에만 선택적으로 몰입하고 인지적인 관여를 거부하는 생활이 긴 시간 누적되면서, 아이는 마치 성장이 멈춘 어린아이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는 이 예시를 통해 우리의 뇌가 얼마나 훈련에 쉽게 영향을 받는지 인지해야 한다. 꾸준한 사유를 통해 인지적인 지구력을 퇴화시키지 않는 것은 AI 시대에서 지치거나 나약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기초적인 보호 요인이 될 것이다.
AI는 내 취향에 완벽하게 맞추어주는 영리한 대상이다. 하지만 AI와 SNS의 연합 작전 속에서 우리는 종종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이전 보다 더 많은 사람의 소식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지만, 진정한 소통으로부터는 자꾸만 멀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위로는 공감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처럼 불완전한 대상으로부터, “나도 너와 같은 자리에 있었어”, “나도 그랬던 적이 있어”와 같은 진심이 담긴 공감대 형성이 마음의 안정을 가져오고 좌절로부터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 기계적이고 완벽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지지해주는 경험을 통해 온전한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 나의 서툰 부분을 숨길 필요 없이 그대로 인정하고, 상대의 약점을 너그러이 수용하면서 서로 의지하는 연대만이 식어가는 온기를 지키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시대야말로 사람이 사람에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인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리고 불완전함을 기반 삼아 성장하고 연대하며, 나아가 주체적인 개인이 된다. AI 시대에서 심리적으로 소진되지 않는 길은, 정답을 소비하는 수동적인 존재로부터 벗어나, 개인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 주체로 바로 서는 것이다. 불완전함을 결함이 아닌 성찰과 성장의 기반으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겪는 삶 자체를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으로 바라볼 때, 기술에 종속되지 않는 주도권과 존재 가치를 찾게 될 것이다.